기독교에서의 형이상학과 윤리학
기독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과 비교하여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수월하다. 기독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호의적이다. 신이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이며 만물의 목적이라는 관점은 기독교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무 작용도 하지 않고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신은 창조도 할 수 없고 은총도 베풀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세계가 보다 깊은 차원에서 신에게 의존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즉 신은 단지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는 “작용인”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신은 창조자다.
기독교의 목적론은 신의 창조 개념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자기 자신만을 사유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과 달리 기독교의 신은 전지전능하며, 따라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유하고 실현할 수 있다. 신이 자기 행동을 완전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신은 창조 이전에 이미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기 전에, 즉 현존(existence)하기 전에 본질(essence)이 선험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세계의 관념은 신을 통해 창조 전에 규정되었으며 창조를 통해 현존하게 된 세계는 미리 규정된 본질 또는 관념에 따라 실제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은 중요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다시 만나게 된 다. 즉 물질계는 단지 물질적 상호작용만으로 이루어지고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과 목적에 따라 이루어지고 작동한다.
창조는 유대-기독교 전통과 그리스 철학을 구분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신이 세계의 창조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반면 세계는 신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물질이 아니다. 물질은 다른 존재의 작용을 받아 변화할 수 있는 수동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은 비물질적인 존재이면서 물질계를 창조한 것이다. 즉 세계는 무(無)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창조의 개념에 따르면 인간은 신의 작용과 목적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세계 속에 포함된 인간은 신의 창조를 일방적으로 받을 뿐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타자인 신의 목적이나 작용 방식을 유추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인간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에 불과할 뿐이다. 타인의 생각을 정확히 읽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기독교적 형이상학에 따라 규정된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만일 창조자와 피조물을 연결해줄 수 있는 기제가 없다면 기독교는 허무주의가 될 것이다. 세계와 인간의 본질 및 실상이 밝혀질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삶의 객관적 의미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의 작용과 목적을 알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놓는다. 물론 인간적 방식으로만 접근할 경우 신의 목적과 작용을 알 수 있는 길은 막혀있다. 기독교에 따르면 신에 대한 참된 지식은 신이 직접 가르쳐주는 것밖에 없다. 즉 어떠한 방식으로든 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야 인간은 신에 대해 알 수 있다. 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계시다. 따라서 창조된 세계도 신의 자취, 신의 목적과 작용 방식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다. 특히 성서는 선지자에게 내려진 신의 계시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세계 및 삶과 관련된 모든 지식과 규범은 계시에서 끌어내야 한다. 나아가 기독교는 선지자를 매개로 계시를 내리는 차원을 넘어서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함으로써 세계와 삶의 본질을 알려준 그리스도를 등장시킨다. 그래서 기독교에 따르면 인간은 계시에서 내려진 규범 및 신이 육화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역시 기독교적 형이상학과 윤리학이 종합된 방식이다.
유교에서의 형이상학과 윤리학
유교에서도 역시 세계에 대한 전체적 관점과 삶의 태도가 분리 불가능하게 종합되어 있다. 앞서 공자가 말을 삼가는 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에서부터 축적되어온 지혜의 전통을 단절하지 않으려는 시도였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공자의 이런 태도는 사실 세계 전체에 대한 관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삶과 가르침은 항상 하늘 또는 만물의 운행과 맞닿아 있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을 삼가겠다고 하는 것은 말을 통해 세상의 흐름, 즉 도를 중단시키거나 장애물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다. 즉 만물과 합일하려는 윤리를 나타낸다.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予欲無言) ......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네 계절이 돌아가고 만물이 생장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또한 공자는 자신의 사사로운 뜻을 강조하지도 않고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마음도 없었으면 고집도 없었고 이기적인 자아도 없었다고 한다.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단절하셨으니, 사사로운 의견이 없으셨으며,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 없으셨으며, 고집함이 없으셨으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없으셨다.” (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공자의 이 같은 윤리적 태도는 그가 천지의 흐름과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 천지는 음양의 상호작용이며 한결같은 운행으로서 도덕의 원천이다. 사사로운 뜻에 특권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신의 개별적인 관점을 부각함으로써 세계의 흐름에서 이탈하는 편협한 태도가 된다. 이는 절대 이탈하지 않는 운행의 한결같은 덕(天德)과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뜻한 바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없다. 공자는 한결같은 운행과 일치하기 위하여 자신의 관점을 규칙이나 의무로서 미리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선입견에 고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고정된 입장, 즉 고집함이 없다. 공자는 특수한 관점에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천지의 운행과 연동되어 나아간다. 결국 공자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없다. 공자는 자신의 성격을 규정짓는 특수한 자아가 없는 것이다. 유교에서 지혜는 특권적 관념이 없고, 지켜야 할 의무를 미리 부과하지도 않으며, 고정된 입장에 자신을 고착화하지도 않고, 자신의 인격을 개별화할 수 있는 것도 없는 태도를 일컫는다. 현자의 인격은 완전히 개방적이며 운행 전체의 흐름과 일치한다. 현자가 갖춘 인격의 풍부함은 운행의 전체적 의미와 결합한 데서 비롯된다. 형이상학이나 윤리학과 같은 용어들이 비록 서구적 용어들이지만, 유교 역시 세계 전체에 대한 관점과 삶의 구체적 방식을 결합한다는 점에서 형 이상학과 윤리학의 종합을 이루어내고 있다.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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