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라는 용어는 타당한가?
‘철학’이 그리 단순한 내용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라는 점은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철학’이라는 용어는 타당한가? 여기서 새삼 언어적 논쟁을 장황하게 불러일으킬 의도는 없다. 이는 근대시대에 일본을 통해 걸러진 학문용어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고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미궁이 될지도 모른다. 철학과 관련하여 최근 국내 학계에서 변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철학’이라는 단어에 수험생들이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대학의 ‘철학과’가 명칭을 바꾸는 경우가 잦다. 그래서 철학과와 다른 과를 통폐합하여 ‘문화콘텐츠학과’ 등의 묘한 단어들로 새로운 학과의 명칭을 정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일반적으로 기존 철학 전공자들은 ‘철학’ 자체의 순수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이런 움직임에 저항하는 기류가 강하다. 물론 서양철학, 동양철학, 중국 철학, 한국철학, 인도철학 등 자연스럽게 ‘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기 때문에 ‘철학’을 하나의 실체로서 규정하고 순수학문으로서 고수하려는 입장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철학’이 서양 학문의 philosophia라는 특수한 명칭을 번역하려고 일본인들이 조합한 단어라는 점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고민해보아야 한다. 만일 philosophia가 서양 특유의 관점을 내포한 학문이라면 사태는 정말 심각해진다. 이 경우 동양철학, 중국철학, 한국철학 등의 용어는 문화적 간극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기묘한 복합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이라는 용어의 기원인 philosophia는 무슨 뜻인가?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철학 입문 과정을 가르칠 때면, philosophia라는 단어는 희랍어의 어원을 통해서 설명하게 마련이다. philosophia는 ‘사랑하다’라는 뜻의 philein과 ‘지혜’ 또는 ‘지식’이라는 뜻의 sophia가 결합한 단어다. 따라서 philosophia는 ‘지혜 또는 지식에 대한 사랑’이 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양에서 철학을 정의할 때 강조하는 것은 철학은 지혜의 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욕구라는 점이다. 그래서 철학은 지혜나 지식을 이미 소유한 상태라기보다는 그것을 추구하고 탐구하는 활동이다. 지혜나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확고한 답을 찾은 사람이기 때문에 더 이상 탐구하지 않을 것이고 타인에게 자신의 지식을 가르치고 나아가 강요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은 오만한 사람이다. 이와 달리 진정한 철학자는 이미 지식과 지혜를 소유했다고 단언하지 않고 겸허하게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지혜와 지식의 관계
지혜와 지식의 관계는 무엇인가? 둘은 동일한 것인가? 분명 지혜를 뜻하는 sophia는 ‘지식’의 뜻도 가지고 있다. 서양에서도 이 두 단어는 구분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있고 동일시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지혜에 대한 물음에 대해 서양에서 처음으로 지혜는 곧 지식이라고 말한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지식과 지혜는 동일한 것이다.” 이때 ‘지식’은 episteme다. ‘에피스테메’는 확립된 지식 체계를 의미한다. 이제 서양에서 철학의 방향은 정해진다. 철학은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지식, 세계 만물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의 추구가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지혜의 친구라고 말한 만큼, 답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서양에서 소크라테스는 philosophia의 의미를 구현한 상징이다. 소크라테스가 아직 지혜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인정한 것은 달리 말하면 지식을 갖지 못했다는 뜻이다. 서양철학의 대부인 소크라테스가 바로 지혜와 무지의 경계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즉 지혜의 친구로 규정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다는 것만을 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겸허함을 무지(無知)의 지(知)라고 말한다. 그래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철학의 모범으로써 평가된다. 그러나 지식의 추구에 묶여있는 철학자는 일상생활에서 서투르다. 플라톤은 철학자의 서투름을 변호한다. 스승의 부당한 죽음을 지켜본 플라톤은 정립되지 않은 견해(doxa)들이 부딪치는 세상을 넘어선 진리의 세계로 눈길을 돌렸고 일상의 경험 세계는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하늘을 관찰하다가 우물에 빠진 탈레스를 놀리는 것은 범인(凡人)들의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탈레스는 천문학에 열중하여 하늘을 쳐다보다가 우물에 빠졌다. 트라키아 출신의 재기발랄한 하녀가 이것을 보고, 하늘에 있는 것을 알아내려는데 너무 열중하다가, 바로 자기 발밑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탈레스를 비웃었다. 그런데 이러한 야유는 철학을 하면서 사는 사람에게는 적절한 야유이다. 실제로 이런 사람은 자기 이웃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며, 자기 이웃이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은 공동생활 을 하는 곳이나 재판소 같은 곳이나 또 다른 곳에서 자기 발밑에 있고 자기 눈 아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할 때에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우물에 빠지고 온갖 어려움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들의 이런 것을 보면, 트라키아 소녀들만이 아니라 웃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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