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철학] 철학하는 태도_독단론과 회의론

by 잡다정보 2025. 2. 1.

어떤 철학 체계도 해석의 다양성을 촉발하지 않으면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

개요


이전 포스팅에서 철학을 동서양의 사상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즉 철학은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종합을 통한 자기 정립이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어떤 방식이 되었든지 간에 자신의 입장을 정리함으로써 탄탄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성향이다.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는 것도 하나의 입장이다. 확정적인 것은 전혀 없으니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겠다는 것 역시 일정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입장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인해 자기 관점의 일점일획도 변경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독단과 맹신이 된다. 그러나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종합한 체계가 여럿이기 때문에 우리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다양한 문화가 있듯이 다양한 철학이 있다. 문제는 형이상학과 윤리학이 종합된 견고한 철학 체계 중 하나를 따를 때 독단을 피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각각의 철학 체계들은 나름대로 이해 가능성 또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입장을 정립하는 것은 항상 독단인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독단은 한 입장이 정형화되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변화가 없는 입장은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어떤 철학 체계도 해석의 다양성을 촉발하지 않으면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 특정 철학이 마치 대량의 동일한 상품을 찍어내듯이 복사될 때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인류는 독단의 폐해를 수없이 겪었다. 기독교가 그것을 전하는 이들에게조차 온전히 이해되지 않은 채 교조화되었을 때, 그리고 유교가 정치와 일체가 되어 절대적 실체로서 군림했을 때 이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사상의 생명력이라기보다는 물리적 폭력이었다. 독단은 절대적 진리를 재산처럼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광신자들의 무지와 착각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물론 특정 철학이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문화로서 발전하는 것은 동질화를 통한 확산 과정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만일 절대적인 동질화가 실현될 경우, 그래서 인류 전체가 단일한 문화를 따를 경우 의식(意識)은 상실되고 사물들의 분별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문화는 힘의 관계다. 달리 말하면 특정 체계가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는 것은 다른 체계들을 약화할 때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문화는 상반되는 두 작용을 통해 발전한다. 문화는 동일성을 향하는 동시에 다양화되고 있고, 용해되어 가는 동시에 분리되어 간다. 문화의 본질은 지배적인 문화로 상승하는 동시에 분란을 겪는 데 있다. 이와 같은 문화의 본질을 외면하고 특정 체계가 이데올로기화되는 것을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


철학은 특정 체계가 이데올로기화되는 과정의 모순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일례로 기독교가 독단으로 변질되는 것은 반(反)기독교적 태도를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기독교의 계시 개념을 설명한 바 있다. 기독교에서 신은 창조자이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래서 창조의 모든 의미를 인간은 신의 입장에서처럼 알 수는 없다. 물론 신은 인간이 세계와 자신의 의미를 파악하도록 계시라는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계시의 주체는 신이다. 어떤 인간도 신의 위치에서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마치 신을 정확히 대변한다고 주장하면서 특정 지식과 규범을 강요한다면, 종교는 인간적 권력의 지원 하에 경직화되고 교조화되기 시작한다. 신중심주의가 인간주의로 변하게 된다. 기독교를 열렬히 옹호하겠다는 자세가 오히려 반기독교적 태도로 변질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조를 냉철히 분석하고 모든 인간적 시도를 불충분한 관점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개방적 태도를 요청하는 ‘기독교 철학’이 부재할 때 독단의 위험이 확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독단적 종교인과 비 독단적 종교인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유교나 도교를 비롯한 동양 사상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동양 사상의 대전제는 아마도 세계는 신이나 이데아 같은 초월적 원리의 하위에 위치한 불완전한 곳이 아니라 한결같은 모습으로 변화하는 운행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시각각, 하루하루의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십수 년 전의 사진을 보면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변화는 고요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고요한 변화가 바로 운행이다. 운행을 원리로 삼는 세계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일은 사유나 사태를 고정해 바라보는 것이다. 앞서 공자가 고정관념이 없다고 강조한 점을 기억하자. 그런데 인간에게 사유나 사태를 고정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언어다. 만일 유교나 도교를 따른다고 하는 이가 언어로 구성된 규범에 절대적으로 매여 있다면 이는 모순된 태도가 된다. 기독교에서 인간적인 판단을 최대한 피하고 모든 판단을 신에게 맡기듯이, 경직된 규범이나 명령 자체가 아니라 천지의 거대한 흐름에 충실한 것이 동양 사상에 부합하는 태도일 것이다. 노자의 위대한 문구를 깊이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 不知) 운행의 흐름을 끊지 않으려면 말을 삼가야 할 것이다.


실제 역사적 사례


실제로 우리 역사는 유교의 교조성과 기독교의 경직성이 전면적으로 충돌한 사건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조선 후기에 ‘서학’(西學)이란 이름으로 유입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대표적인 예다. 사회적 모순의 개혁을 도외시하고 전통질서를 고수한 조선 정부의 대응은 천주교도들의 대규모 살상을 동반한 탄압으로 이어지고 조선 사회의 붕괴를 재촉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동시에 당시의 사회구조를 지탱해주던 전통을 외래문화에 비추어 미신으로 간주한 천주교 측의 독선적 태도 역시 조선 정부의 강경한 입장에 빌미를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유학과 서학(西學)의 관계에 대해 방대한 업적을 남긴 국내 학계 원로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독단의 위험성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교의 전통에는 상고적(尙古的) 보수성이 깊이 깃들어 있지만, 합리적·현실적 정신은 서학과의 관계를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전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경장(更張)할 시기에 수성(守成)만을 고집한 시의(時宜)의 상실이 조선 사회의 급격하고 전면적인 붕괴를 재촉하였던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천주교 전교도 유교 전통을 미신화하는 몰이해의 폐쇄성 속에 갇혀 전통 사회와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을 능력이 없었던 측면을 볼 수 있다. 이 양자의 관계는 대립과 갈등에서 투쟁으로 변질하였고, 서양 근대 문명의 압력으로 동양의 전통 사회가 붕괴하는 근대화의 시대적 전환을 맞이하였다. 오늘날에도 유교는 전통적 유산으로, 천주교는 서양적 근대정신으로 규정하여 이해하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간의 이질감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새로운 한국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적절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말 것으로 생각된다.”(금장태, 한국유교의 이념과 서학 문제, 117~118쪽)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