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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 철학하는 태도_형이상학과 윤리학

by 잡다정보 2025. 2. 1.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과 윤리학

 

몇몇 사상의 예를 통해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종합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앞서 ‘형이상학’이 metaphysica의 번역어라는 점을 언급했는데, 서양에서 형이상학의 전통을 세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례를 통해 논의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세계 전체에 대한 관점과 삶의 방식은 어떻게 종합되는가? 서 구근대의 여명기까지 2000여 년간 서구의 자연관을 지배해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질료형상론이라 불린다. 그의 핵심적 관심사는 세계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세계를 바라보고 탐구하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은 운동 또는 변화다. 식물은 자라고 동물도 뛰고 헤엄치며 날아다닌다. 이런 질적인 변화 외에도 존재들의 생명이 있다. 탄생도 변화이고 죽음도 변화다. 변화하는 존재들이 있고 변화는 운동에 의해 일어난다.

 

변화는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도토리가 현재 특정한 규정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상태는 현실태(energeia, actus)이며 참나무가 될 가능성의 상태는 가능태 또는 잠재태(dunamis, potentia)다. 따라서 ‘생성’ 혹은 ‘됨’은 이미 존재하고 규정되어 있는 실재를 내포하는 현실태인 동시에 아직 결여하고 있는 규정을 향하는 잠재 태다. 도토리의 형상 혹은 목적이 참나무라면 참나무는 관념으로써 도토리에 작용한다. 도토리라는 질료는 목적 또는 자신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듯이 참나무라는 형상을 향해 가는 것이다. 형상은 물리적인 형태나 윤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의 본질은 그것이 실현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토리의 본질은 참나무다. 즉 도토리에는 참나무로 이끄는 어떤 성향이나 목적이 있다. 이런 목적이 도토리의 형상이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가 보는 자연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어느 정도 파악될 수 있다. 자연은 수많은 형상을 가진 실체들의 총체다. 이 실체들 사이에는 일정한 질서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무기물은 식물에 양분을 공급하고 식물은 동물의 먹이가 되며 작은 동물은 큰 동물의 먹이가 되면서 변화한다. 또 무기물, 식물, 동물의 특질은 인간에게 모두 발견되며 유용하게 사용된다. 서로 질적인 차이를 지닌 무수히 많은 형상의 존재들이 변화하며 어우러지는 세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이다.

 

그러나 한 현실태가 다른 현실태로 변화하는 근거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 일정한 작용 또는 운동이 가해져야 한 상태가 다른 상태가 된다. 하지만 운동은 또 다른 운동을 요구한다. 그리고 두 번째 운동은 다시 제3의 운동을 필요로 한다. 운동의 사슬은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해진다. 운동의 사슬이 무한히 이어진다면 애초에 설명하고자 했던 ‘변화’가 불가능해진다. 바로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외침을 이해해야 한다. “어디선가 멈춰야 한다!”(ananke stenai)

 

운동 사슬의 시작에 어떤 동체가 있다면 변화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까? 그럴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움직이는 동체라면 역시 움직임을 통해 다른 상태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움직이게 한 또 다른 동체를 다시 가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변화가 가능하고 설명이 되려면 운동의 근원이되 자신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이런 역설적 존재가 부동의 원동자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이라 명명하는 궁극의 존재다. 신을 부정하는 것은 변화의 실재성과 이해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경험과 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이 경우 신은 무(無)에 불과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세 가지 행동 방식이 있다:

 

  • 생산(poiein/production): 생산이란 어떤 사물을 다른 상태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신은 운동하지 않으므로 생산하지 않는다.
  • 실천(praxis/practice): 실천이란 행위자가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신은 운동하지 않으므로 역시 실천하지 않는다.
  • 관조(theoria/contemplation): 관조는 대상을 고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다. 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관조밖에 없다.

관조는 이미 획득한 수학적 지식을 관조하는 행위와도 같다. 즉 부동의 행위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관조다. “운동의 활동뿐 아니라 부동의 활동도 존재한다.” (그리스 철학 전체의 관점이지만) 항상 고정된 것이 유동적인 것보다 우월한 것이다. 집을 짓는 행위보다는 지어진 집, 완성된 집이 더 완전하다. 모든 운동은 목적에 도달할 경우 멈출 것을 지향한다. 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부동의 활동인 관조밖에 없다. 게다가 신은 자기 외부에 있는 것들을 관조하지도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신은 그것들에 영향을 받고 의존되고 그것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신은 자신과 다른 것들을 사유하지 않는다. 신은 자신만을 사유한다. 신은 사유의 사유이다. 가장 고귀한 행동은 사유이고 관조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철학의 최종 목적은 실천이 아니라 이론이다.

 

신이 사유의 사유라면 우주에는 아무 작용도 하지 않는가? 신은 우주의 목적 원인으로서 작용한다. 즉, “목적인은 사랑의 대상으로써 움직인다.” 이는 움직이지 않고 단지 존재하는 욕망 대상 때문에 욕망 주체가 이끌려 움직이는 것과 같다.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아니고, 플라톤이 ‘데미우르고스’라고 명명한 제작자에 의해 가공된 것도 아니다. 우주는 신의 매력에 끌려 신을 향할 뿐이다. 절대적인 초월성,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다. 신은 우주의 목적일 뿐이다. 우주와 분리된 신, 즉 부동의 원동자를 향하여 우주는 움직이고 있다. 이 궁극적 목적을 정점으로 모든 형상들의 위 계질서가 세워진다. 물리적인 존재들은 신, 즉 순수 현실태(actus purus)를 향한 사랑의 표현인 근원적 욕구를 통해 현실화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자연은 부동의 원동 자를 정점으로 하여 관념들을 향해 움직이는 질료형상 복합체들의 총체다. 따라서 자연 은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물체들의 상호 작용만으로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은 관념성에 따라 방향성을 갖고 작동한다. 이렇게 물질이 비물질적인 요소에 의해 작동하고 방향 지워진다.

 

인간의 행복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이런 방식으로 정립되었다면, 이런 세계관 하에서 삶의 방식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신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 인격신이 아니라 그저 영원히 존재하는 사유다. 그러나 가장 고귀한 행동은 사유이고 관조다. 실천은 변화를 함축하는 반면 이론은 고정된 사유 방식으로서 신에게 근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신을 사유하는 데 있다. 물론 신을 사유하려면, 변화의 주체인 육체적 쾌락에 매여서는 안 된다. 육체를 통제하고 정신의 지배하에 둠으로써 고정된 상태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지성적인 능력을 극대화함으로써 육체에 의존되지 않는 정신적 경지에 이른다면 이는 신적인 관조 상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지성을 통해 신적 관조 상태에 간헐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최고의 존재인 신, 사유하는 신과 일치하는 이런 상태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되는 것이다. 순수 사유인 신과 사유를 통해 합일을 이루는 것,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형이상학과 윤리학이 종합되는 방식이다.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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