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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 철학하는 태도_상대주의와 애호주의

by 잡다정보 2025. 2. 1.

독단론이 철학이 피해야 할 태도라면 피상적인 상대주의 역시 경계해야 할 태도다.

상대주의

 

독단론이 철학이 피해야 할 태도라면 피상적인 상대주의 역시 경계해야 할 태도다. 독단론은 상대성을 보지 못하고 하나의 특정한 확실성에 천착하고 하나의 입장을 고수하며 다른 모든 입장들을 배제하기 때문에 폐쇄적 태도다. 그러나 문제는 독단을 거부할 경우 서로 대립하고 상충되는 체계들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특히 위대한 사상 체계 간의 대립은 견고한 입장의 가능성 자체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한다. 동일한 세계를 앞에 두고 수많은 상반된 사상들이 대립했으나 그 어떤 사상 체계도 절대적 위상을 확립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나아가 여러 문명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문화적 편견과 습벽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은 대립이나 차이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낯선 체계들이다. 존재, 신, 자유, 목적 같은 용어들은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일종의 철학소(素)들이지만 동양에는 아예 그런 표현이 쓰이지조차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하여 신을 의미하는 Deus를 중국어로 옮기려다가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늘, 혼(魂), 리(理), 태극 등 많은 용어가 후보에 올랐으나 모두 Deus를 나타낼 수는 없었다. 서양에서 철학을 구성하는 용어들 대부분이 모두 1800년대 이후 동양이 서양문명을 접하면서 궁여지책으로 번역한 단어들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 전체에 대한 보편적 관점을 자랑하던 철학 체계라는 것이 사실은 특정 지역의 문화적·언어적 제약에 묶여 있는 관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동일한 문명권 안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철학적 논쟁은 삶의 진짜 의미와 관계없는 놀이나 경연대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에는 실질적인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단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포장해온 것은 아닐까? 우리는 철학의 이름으로, 인문학의 이름으로, 과학의 이름으로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찾아야 하는가? 여러 체계가 상충하는 것을 볼 때 아무 확실성도 없어 보이는데, 아무런 지지대도 없이 비축 식량도 없이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항해를 떠나야 하는가? 또다시 고전들의 세계로 들어가 고리타분하고 해묵은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환상일지도 모르는 답을 찾아 나서야 하는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성경에 나오는 이 구절이야말로 우리 삶의 상황을 집약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스피노자 또한 사람들의 판단은 머릿수만큼 종류가 많기 때문에 회의론이 등장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회의론, 상대주의 등은 세계와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한 의식을 나타낸다.

 

애호주의

 

회의론의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애호주의 (dilettantism)도 있다. 애호주의는 19세기에 문학가들 사이에서 풍미했던 관점으로서 근본적인 회의론과 유사하지만, 삶의 불확실성 때문에 번민하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삶의 방식을 즐길 것을 제안한다. 애호주의는 삶의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고정된 해결을 시도하기보다는 문제를 없애버리는 데서 해답을 발견한다.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하고 수많은 사상과 예술, 문화, 상품 등으로 가득한 오늘날 애호주의의 입장은 더 큰 설득력을 갖는 것 같다. 생존을 위해 뛰어야 하는 이 번잡하고 격렬한 세상에서 불확실한 답을 찾아 나설 시간과 호기심을 가지라고 말하는 철학자는 무책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존재하지도 않는 심각한 문제는 잊고 현대 문명이 제공해주는 다채로운 대상에서 기쁨을 만끽하고 지루해질 때면 때때로 상상으로 근심을 만들어내고 다시 즐길 준비를 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삶은 공허한 것이니 말이다. 시간과 호기심을 내는 것도 괜찮다. 철학, 과학, 경험, 예술 등 모든 것을 맛보고 즐김으로써 호기심, 싫증, 공허함, 쾌락을 번갈아 느끼면 된다. 어차피 삶을 짓누르는 것도 없고 위협적인 것도 없고 실재적인 것도 없다. 모든 것을 해보는 것, 삶의 근본적인 문제 같은 거짓 불안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면 된다. 한 제단에 무릎을 꿇었다가 웃으며 일어나 다른 제단으로 가자. 우리가 사는 곳은 다원적 세계 아닌가?


우리가 삶과 세상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시각과 경험이 부족해서일 수 있다. 그래서 거짓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것저것 모두 다 해보는 실험주의가 답이다. 아직도 사물들 각각에 이름을 부여하고 사태를 규정하는 순진한 단견을 조롱하는 것이 낫다. 스스로 모든 지식이 되고 모든 감각이 되고 모든 경험이 되는 것이 환상에서 벗어 나는 길이다. 존재하지 않는 문제보다 더 해결 불가능한 문제는 없다. 삶의 문제를 해결할 가장 확실한 단 하나의 수단은 삶의 문제를 제거하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블롱델은 애호주의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삶에 은총과 경쾌함과 명랑함을 되돌려주려면 인간 행위를 무거운 불가해성과 신비한 실재에서 해방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운명의 문제를 순진하게 믿고 이에 대해 쾌락주의든 불교적이든 또는 기독교적 답이든 간에 어떤 답을 찾고자 할 때 운명의 문제는 두려움을 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고통스럽다. 우리 운명의 문제는 아예 제기하지를 말아야 한다.”


“속는 줄도 모르면서 속는 것은 확신에 찬 자들, 열정적인 자들, 야만인들의 어리석은 불행이다. 그러나 환상에 동의해주고 모든 것을 헛되고 재미있는 희극처럼 즐김으로써 속는 줄 알고 속는 것, 마치 필연적인 듯이 행동하되 과학의 건조함으로 행동을 죽이고 과학은 꿈의 풍부함으로 죽임으로써 그림자의 그림자에조차도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것, 박식한 학자답고 유쾌하게 스스로를 지우는 것, 이런 것이 가장 탁월하고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인식하고 소유하고 있는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들이야말로 중대한 문제라는 것은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할 권리를 지닌 유일한 사람들이 아닐까?”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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