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철학] 낙관론_비관론의 문제

by 잡다정보 2025. 1. 30.

무는 과연 가능한 개념이고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쇼펜하우어의 논의에 대한 의문

쇼펜하우어의 모든 논점은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제목이 나타내듯이 의지와 그 대상화에 관련된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차원의 의지는 윤리적 차원에서 고찰된 의지와 다르게 나타난다. 쇼펜하우어의 확신에 따르면, 의지는 유일하지만 모든 존재자, 특히 인간에게서 개체화된다. 의지의 개체화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그러나 무엇이 이 장애물을 제거해주는가? 미지의 방식으로 현상 속에 분산되었다가 순수성을 되찾는 보편 의지인가? 아니면 현상들의 무용성을 인식한 후에 보편 의지에 합류하는 개체적 의지인가? 첫 번째 경우 우리는 자신의 결과들을 원하다가 더 이상 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부정하는 보편 의지 개념을 마주치게 된다. 두 번째 경우 우리는 환상에서 빠져나오고 자신의 본질적 존재로 향할 수 있는 능력을 개체적 의지에 부여해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결론은 두 번째 경우로 기운다. 다음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마감하는 신비주의적 색채의 문장이다.


“(......) 우리들은, 의지를 완전히 폐기한 후에 남는 것은 아직 의지를 충분하게 가진 모든 사람에게는 사실 무에 지나지 않는다고 거리낌 없이 고백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의지가 스스로를 전환하고, 스스로를 부정하여 버린 사람들에게도, 우리들의 그렇게도 사실적인 이 세계는 모든 태양과 은하수와 더불어 - 무인 것이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94쪽)


쇼펜하우어는 이 마지막 문장에 주석을 덧붙이면서 논의를 마무리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도의 반야 바라밀이며, ‘모든 인식의 피안’ 즉 이미 주관과 객관이 없는 경지이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신의 인격성과 창조 학설을 부정하고 신플라톤 학파와 유사한 방식으로 의지의 유출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보편 의지는 육체 속에 구현되면서 현상 또는 표상 세계로 실추된다. 따라서 삶의 부정을 통하여 의지의 근원적 실추를 회복시키는 것이 관건이 된다. 이는 개체적 의지가 현상에서 빠져나옴으로써 존재의 영역으로 향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주관과 객관의 모든 구분을 넘어선 존재의 위상을 무(無)가 대체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무는 과연 가능한 개념이고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이제 쇼펜하우어의 비관론 체계에 대한 몇몇 난점을 살펴볼 시간이다.

 

비관론 체계의 난점

인간의 고통과 무의 결론은 단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인간의 삶을 고통으로써 인식하는 것은 삶을 짓누르는 필연성과 그로부터 해방되려는 심층적 갈망 사이에 존재하는 대조에 의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개체의 수동성과 고통에 대한 전적인 긍정은 적어도 전체적 해방의 의지를 모호하게라도 함축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일상에서 우리가 개체의 생존을 위한 외형적 선들에 애착을 가지면서 일련의 실망스러운 사태만을 마주친다면, 오히려 외형적 선들을 넘어서 선 자체를 추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외형적 선들에 대한 실망은 보편적 선의 추구를 함축한다. 


또한 우리는 비관론이 의지와 표상, 또는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존재와 현상의 불균형에서 끊임없이 인간의 고통에 대한 근거를 찾아내고 결국 의지의 무화(無化)를 통해 표상도 무화시키려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개체적 삶의 불충분성은 의지라는 존재와 비교할 때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존재에 반대해서는 현상의 불충분성을 논거로 내세울 뿐이다. 비관론자는 “현상의 불충분성을 선언하는 순간에도 마치 현상이 견고하고 실재적인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현상에 묶여 있다.”(행동, 69쪽) 즉 비관론적 논변은 때로는 존재를 부정하고 때로는 현상을 부정하지만, 결코 존재와 현상 모두를 동시에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칸트적 물자체를 의지로 대체함으로써 자신의 체계를 확립하고 고통에 대한 해결로서 무를 제시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무에 대한 의지는 어떤 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 한편으로 무에 대한 의지는 현상 세계에서 실추되는 존재 의지의 부정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달리 말하면 무에 대한 의지만이 진정한 존재 의지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관론이 제시하는 구원은 존재 의지의 파괴에 있다. 달리 말하면 오직 현상에 대한 의지만이 효과를 갖게 된다. 요컨대 비관론의 추론은 무의 개념을 도출하기 위해 존재와 현상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무는 단순하고 판명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하는 무의 의지는 사실상 존재와 현상에 대한 애착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 점에 대해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우선 무는 인식 가능한가? 무는 오직 인위적 형태로만 사유할 수 있다. 베르그손은 무의 인식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 모든 것을 삭제한다는 의미에서 절대무의 관념은 자기 파괴적인 관념, 거짓 관념, 단순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한 사물을 제거하는 것이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것이라면, 한 사물의 부재를 사유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의 현존에 대한 다소간 명확한 표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면, 그리고 삭제는 무엇보다도 대체를 의미한다면, 라는 관념은 사각형으로 된 원의 관념만큼이나 부조리하다.”(창조적 진화, 420~421쪽) 


무의 개념은 오직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또는 적어도 상대화되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무는 존재하지 않을 때만 존재한다. 무는 순전히 가상적인 속성만을 내용으로 갖는 낱말일 뿐이다. 무는 엄밀한 의미의 존재론 차원에서 볼 때 존재하지 않는다.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