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개념
무의 개념은 오직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또는 적어도 상대화되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무는 존재하지 않을 때만 존재한다. 무는 순전히 가상적인 속성만을 내용으로 갖는 낱말일 뿐이다. 무는 엄밀한 의미의 존재론 차원에서 볼 때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질문은 무를 원할 수 있는지며 이에 대한 답도 역시 부정적이어야 한다. 현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신과 대상 모두를 무화시키려는 욕구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으로서 다시 한번 엄밀히 진단할 필요가 있다. 무를 추구하는 비관론적 의지는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는가? 의지가 존재하지 않고자 시도한다면 그리고 이런 시도가 실현되기를 원한다면, 의지는 자신이 존재하기를 원해야 한다. 즉 의지는 자신이 애초에 추구하고자 했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는 명제는 곧바로 는 명제로 전환된다. 원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원하는 것이다.
비관론은 불안정성을 내포한 체계다. 무의 개념을 산출하기 위해 비관론자는 현상과 존재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 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현상과 존재를 모두 인정하고 있다. 현상의 무용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가치를 내세우고 존재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현상만을 강조하면서 무의 작위적 관념이 산출된다. 결국 비관론은 현상에서 존재로의 또 존재에서 현상으로의 중단 없는 왕복을 견디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모든 것을 무의 관념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의지 자신에 의한 의지의 파괴를 주장한다. 그러나 비관론에서 의지는 무를 정립하기 위해 현상과 존재를 계속해서 사용할 뿐이다. “현상은 무의 개념, 무의 정복, 무의 의지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완전한 무화를 소망함으로써 우리는 현상과 존재를 서로 대립시키고 차례로 제거하기 위해 둘 모두를 요청한다.”(행동, 71쪽)
결국 비관론은 두 방식으로 파악될 수 있다. 한편으로 비관론의 시도는 근원적 낙관론으로 변형됨으로써 스스로 비관론적 관점을 부정한다. 물론 이런 낙관론의 가지성은 탐색 불가능한 신비적 관념, 즉 무에 의거한다. 다른 한편으로, 비관론의 시도는 존재에 대한 의지, 즉 깊고도 무거운 책임을 의지 주체에게 요구할지도 모를 적극적 참여를 무한정하게 회피하려는 인위적 노력에 불과하다.
신비주의?
비관론 체계를 가능케 한 것은 현상과 본체(존재, 물자체)에 대한 칸트적 구분이었다. 이 두 질서 간의 간극을 통해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대상화된 세계가 존재의 요청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테제를 이끌어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는 현상 세계에서는 자신에 이를 수 없다. 현상 세계에서 의지는 인과율에 의해 결정된 무한정한 현상적 관계들에 불가피하게 종속되기 때문이다. 의지 자체는 원인이 없기 때문에 현상 세계에서는 실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윤리적 차원에서 냉혹한 결정론의 거부는 객체와 주체 모두를 무로 환원시키는 의지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규정될 수 없는 무의 사유 속에 모든 것을 함몰시키는 쇼펜하우어의 체계는 일종의 신비주의가 아닐까?
존재와 현상의 구분을 확정할 경우 존재는 존재 양태들과 분리되기 때문에, 사실 이런 두 질서에 속한다고 가정된 인간이 끊임없이 불확실성에 직면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현상 세계에 표현된 인간의 지향은 자기 뜻과 무관하게 또는 그것을 거슬러서 전개되는 귀결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관론 비판을 통해 무의 관념에 스스로를 함몰시키려는 자기 파괴 행위의 모순이 드러난바, 세계에 대한 다른 관점을 추구할 것이 요청된다. 특히 현상과 존재가 통합됨으로써 존재의 의지가 실현될 수 있는 세계 개념의 추구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이 확립될 경우 존재와 현상의 공상적인 대립도 필요 없을 것이고 그런 대립을 무라는 모호한 개념 속에 은폐할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예술 분석에서 언뜻 존재와 현상이 하나로 통합된 세계 개념을 시사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실제로 그는 의지도 없고 고통도 없고 시간도 없는 관조적 인식 상태를 지시하면서 말한다. “정신이 물(物)을 영원한 형식 밑에서 생각하는 한, 정신은 영원한 것이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36쪽) 이 문구는 쇼펜하우어가 스피노자의 에티카, 5부, 정리 31 주석을 옮긴 것으로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국역본을 그대로 인용했으나 다음과 같이 옮기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정신은 사물들을 영원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한 자신도 영원하다.” 이 테제의 의미는 인간이 자신의 영원한 본질과 세계의 영원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모든 불행은 생존을 위한 개체적 의지에서 비롯되므로, 개체적 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사라지도록 주체가 관조 대상 속에 자신을 투영할 때의 의지 부재 상태를 쇼펜하우어는 염두에 둔 것 같다. 실제로 쇼펜하우어의 예술 분석에서 이런 상태는 관조의 차원에서 영원성을 현재 속에 고정하는 예술적 체험과 유사하다. 또는 이런 상태는 죽음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다. 의지의 포기를 통해 개체화의 원리를 꿰뚫어 보고 종(種)의 이데아 자체를 파악하는 이들에게 죽음은 종(種)의 영원한 운동에 속하는 개별적 사건에 불과하다. 이와 유사하게 예술적 체험과 같은 관조는 특히 천재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으로서 예술적 영혼들이 예외적으로 누리는 상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예술에 자신의 논의를 집중하기보다는 결국 의지의 포기와 무의 수용에 다름 아닌 비관론적 윤리를 자기 철학의 결론으로서 제시한다. 비록 그가 예술을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파악하지만, 결국 쇼펜하우어는 예술을 무가 만들어내는 “어두운 인상”(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94쪽)을 일소할 수단으로 간주할 뿐이다. 달리 말하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영원한 인식을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하는 철학의 방향에서도 너무 일찍 멈춘 것으로 보인다. 무라는 신비적 관념, 그리고 의지와 무의 규정 불가능한 관계에 묶여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철학에서 또 영원한 인식의 철학에서 미완성의 단계에 머물렀다. 그의 비관론은 무에 대한 신비주의적 긍정과 함께 낙관론으로 변형되었을 뿐이다. 비관론의 공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공헌은 우선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관계 지우고 인간을 윤리적 목적으로 더 잘 인도하기 위하여 인간 존재를 형이상학적으로 규정했다는 데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를 의지 또는 본질적인 역동성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헌들은 철학적 체계로서는 핵심적인 균열을 내포한다. 우선 삶에 대한 비관론적 학설의 부조리는 존재와 현상 두 세계의 분열에서 이미 싹을 틔우고 있었다. 본체에 속하는 의지와 양립 불가능한 표상 세계에서 인간의 삶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관론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물자체로서 정의된 의지가 윤리적 차원에서는 스스로를 완전히 파괴해야 하는 모순을 품고 있었다.
인간의 삶은 신비주의적인 무에 함몰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비관론의 철학적 논의를 모두 염두에 두고서 다른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위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는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삶의 고통은 과장된 것은 아닌가? 또는 고통과 행복의 비중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둘째, 존재와 현상의 관계는 무엇인가? 즉 세계의 실상은 무엇인가? 이 라이프니츠는 두 가지 문제를 신의 개념을 개입시킴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최상의 신에 의해 구축된 최선의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관점이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이다.
“당신들이 세상을 안 지는 3일밖에 안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코앞보다 멀리 보지도 못하면서 불평거리를 찾습니다. 세계를 알게 되기까지 기다리고, 특히, 세계에 있는 (유기체들이 그러한 것처럼) 온전한 전체를 나타내는 부분들을 고찰하십시오. 거기서 당신은 상상을 넘어서는 기술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도 사물들 창조자의 지혜와 선이 있다는 귀결을 도출해 냅시다.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우주 안에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는 우리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롭다면 우주는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에 순응한다면 우주도 우리에게 순응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에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변신론 제2부, 194절)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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