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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 비관론_사랑_고통의 연속

by 잡다정보 2025. 1. 30.

사랑은 종족의 이해(利害)다.

사랑

 

사랑은 종족의 혼령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지배되고 있다. 사랑은 종족의 이해(利害)다. 사랑이 종족의 이해라는 사실이 파악되면, 혼란, 갈등, 파탄 등의 사랑의 격렬한 성격도 납득할 만한 것이 되며, 과장되어 보이는 수많은 표현의 의미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영원한 사랑이니 하는 표현들은 사실 과장된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종족 보존이라는 보편의지의 불멸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인한 사건들이 그토록 격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개체는 종족 의지가 어떤 대상에 작용하고 있는 무한한 의지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작고 연약한 그릇”(인생론, 74쪽)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의 결함을 알고도 사랑을 단념하지 못할 경우, 이는 개체의 이익이 잊힌, 종족만을 위한 사랑이기 때문에 “장엄하고도 위대한 징표이다”(인생론, 75쪽). 이런 사실들 때문에 사랑은 수많은 시인과 문학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종족의 혼령은 언제나 개인의 수호신과 싸워서 그를 박해하는 강적으로 군림하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지없이 개인의 행복을 짓밟아버린다.”(인생론, 76쪽) 간단히 말하면, 사랑은 종족의 이익을 위해 개체의 행복이라는 미궁 속에 갇혀 움직일 뿐이다. 온전하게 종족의 이익을 보존한 경우, 개체의 행복은 곧바로 행복이 아닌 것, 즉 비천한 감각적 만족이 되어버린다. 사랑은 함정이다. 개체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들은 사실 종족의 존속이라는 의지의 운동에 가담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은 본능을 망각 혹은 은폐하고 있는 개체의 일시적 상태이며, 개체의 본능은 종족의 이익에 봉사하게 되어 있다. 종족은 의지의 즉각적 객관화인 이데아다. 즉 후세의 존속은 객관화하려는 이데아와 같다. 결국 인간 개체의 모든 행동은 의지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의지가 유한한 개체들 속에 구현될 때 개체들이 겪는 것은 고뇌와 죽음이다.

 

사실 의지 자체는 아무런 한계도 없으므로 죽음과 무관하다. 나아가 의지의 가장 직접적인 객관화인 종(種)의 관점에서 볼 때도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죽는다고 해서 고양이 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종은 이데아다. 영원한 종은 개체의 죽음으로 손상되는 것이 아니다. 종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삶 자체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간이 그렇듯이 개체의 삶에 매달려있는 이들에게 죽음은 하나의 충격이며 삶의 공허함의 증거이다. 특히 삶에 집착하던 우리를 갑자기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동료나 친지의 시체다.

 

고통의 연속

 

개체의 삶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우리의 의지가 객관화된 특정한 의도가 되어 행동을 통해 세계에 던져지는 순간부터, 그 모든 귀결은 필연의 법칙, 표상의 법칙에 지배되기 시작하면서 본래의 의도를 넘어서고 그것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만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지배자도 아니며, 자기 행동 결과의 지배자도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다시 생겨나는 의지와 새로운 실패들 사이를 추처럼 오고 가는 존재이다.


의지는 인간의 모든 존재 자체이므로 쉴 수도 없다. 의지는 “무한히 되풀이되고, 아무런 목표도 없고, 어디에나 궁극적인 만족이 없고 어디에도 쉬는 장소가 없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81쪽) 의지는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고통은 본래적인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필로넨코는 코기토(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문구의 “생각”을 “고통”으로 대체하여 쇼펜하우어의 비관론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고통스럽다, 고로 존재한다.”


“의지는 최저 단계에서 최고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 현상의 모든 단계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나 목적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고 언제나 노력한다. 왜냐하면 노력이야말로 의지의 유일한 본질이기 때문이며, 목표에 도달해도 노력이 끝난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노력은 결코 최후의 만족을 얻지는 못하고 저지됨으로써 끝날 뿐이며, 그대로 놓아두면 무한히 나아가는 것이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80쪽)


“노력이라는 것은 모두 부족에서, 자기의 상태에 대한 불만에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노력이 만족되지 않는 한 고뇌인 것이다. 그런데 만족은 영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새로운 노력의 기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노력의 도처에서 여러 가지로 저지되고, 도처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본다. 따라서 그런 한에 있어서, 노력은 언제나 고뇌인 것이다. 노력의 마지막 목표라는 것은 없고, 따라서 고뇌의 한도라는 것도 없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82쪽)


의지의 발현 정도에 있어서, 자신의 지성 덕택에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한 인간은 사실 최고로 고통스러운 존재다. 인간은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들이 가지지 못한 뚜렷한 자기의식을 가진 것을 불만스러워할 지경이다. “이리하여 인식이 명백해지고 의식이 향상함에 따라 고민도 더해가고 인간에게 이르러서는 최고도에 달하고, 다시 인간에 있어서도 인식이 명백하고 지능이 높으면 높을수록 점점 더 고민은 증대한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82쪽)


결국 모든 불행은 의지가 육체 속에 구체적으로 대상화되었다는 데 있다. 육체는 생존을 위해 자연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양육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 가쁘게 살려낸 육체는 결국 죽음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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