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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 비관론_고통

by 잡다정보 2025. 1. 30.

고통은 삶의 본질 자체로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고통

 

고통은 삶의 본질 자체로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고통은 단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개인들의 문제다. 살려는 의지의 긍정은 이기심과 직결되며, 이기심은 모든 전쟁의 원리다. 왜냐하면 살려는 의지는 자신을 긍정하기 타인의 의지를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부정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의지로써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이기적 의지는 불의와 폭력을 생겨나게 한다. 따라서 전쟁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며,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하며, 적어도 지배하려고 하며, 자기에게 반항하는 것을 절멸시키려 한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07쪽)


앞에서 우리는 개인들의 상호 침해를 막기 위해 국가가 필요함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악으로부터의 도피는 새로운 악을 가져올 뿐이라는 점을 또한 밝혔다. 악의 억압은 다른 악을 불러올 뿐이다. 이제 우리는 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무한정한 보편의지가 유한한 개체들 속에 구현된 모순의 장(場)이 바로 우리의 세계다. 인간의 최대의 죄는 인간이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불행하게 태어난 것이다.


그래도 계속하여 원해야 하는가? 무한한 고통에 직면하여 불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잘못은 삶에 있지 않고 살려는 의지에 있다. 삶이 줄 수 없는 것을 삶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할 수 없는 것을 원하는 의지, 즉 이기적 의지를 점차 약화시키고 결국은 그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한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불롱델은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윤리학을 다음처럼 요약한다.


“존재하려는 의지는 존재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며 바로 이 점에 최상의 고통이 있다. 존재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진리에 진입하게 되면서 우리에게 무한한 위안이 된다. 그러므로 필요한 일은 존재하지도 않는 존재를 그 자체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려는 공상적인 의지를 죽이는 것이며, 인격의 비존재에 동의하고 욕망의 마지막 뿌리까지 그리고 삶에 대한 모든 사랑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보존과 존속을 위한 모든 본능의 사기행각을 폭로하는 것은 인류와 세계에 무(無), 달리 말해 의지의 부재로 정의되는 바로 그 무를 통한 구원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행동, 63쪽)

 

쇼펜하우어의 비관론적 윤리학 확립


쇼펜하우어가 비관론적 윤리학을 확립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그의 윤리학은 철저하게 형이상학에 기반하고 있다. 지성 덕분에 자연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인간은 가장 고통스러운 존재이지만 이제는 지성을 통해 다른 방향에서 통찰력을 발휘해야 한다. 우선 사물들 자체의 본질을 인식해야 한다. 자신이 타인과 구분된다고 보는 이기주의자는 타인의 의지를 이용하고 파괴할 수 있는 인간이지만, 사물들 자체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이는 모든 사람에게서 같은 의지를 본다. 충족이유율, 현상들의 형식, 즉 개체화의 원리인 마야의 베일이 벗겨지는 것이다.


“개별화의 원리, 즉 현상의 형식은 이미 그를 강하게 사로잡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는 그가 보는 남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을 대하는 것과 거의 같은 정도로 가깝게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고통과 남의 고통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고 하며, 남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자기의 향락을 포기하고, 궁핍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는 악인에게는 아주 큰 칸막이인 자타의 구별도 보잘것없는 기만적인 현상의 하나라는 것을 안다. 그는 직접 그리고 추리를 거치지 않고, 그 자신의 현상의 즉자태는 동시에 남의 현상의 즉자태이며, 즉 이것은 모든 사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고, 모든 것의 안에 살고 있는 생에 대한 의지라는 것을 인식하고, 도한 이것은 동물들이나 모든 자연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인식한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51-2쪽)


선(善)은 세계의 본질인 의지를 통찰하는 데 있으며, 결국 유일한 보편적 의지를 의식하면서 모든 이의 동일한 고통을 의식하는 데 있다. 이제 고상한 인격을 소유한 인간이라면 자신의 이기적 “자아”, 즉 개체적이기를 원함으로써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타인들의 고통까지 증가시키는 자아를 지워버릴 준비를 하게 된다. 개체화의 원리를 초월할 수 있는 직관을 그 근원과 실체로 갖는 영혼의 부드러움과 사랑은 우리를 “해탈에까지, 즉 생에 대한 의지, 즉 모든 의욕의 완전한 포기에까지” 이끌어준다. “모든 사랑은 동정(同情)이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54쪽)


모든 이에게서 의지의 동일성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직관은 평정을 가져온다.


“전체에 대한 인식, 즉 물자체의 본질에 대한 인식은, 모든 의욕의 ‘진정제’로 된다. 이렇게 되면 의지는 생을 떠난다. 이제 의지는 자기의 긍정이라고 간주하는 생의 쾌락들이 무서워진다. 이리하여 사람은 자발적인 단념, 체념, 참된 평정과 완전한 무의지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59쪽)


의지의 부정은 의지가 자기 자신의 본래 이기심에 맞서 싸우는 목숨을 건 전쟁이며, 자신과 세계 전체를 즉각적 모순의 관계에 놓으려는 시도를 함축한다.


“자발적인 완전한 동정(童貞)이 금욕, 즉 생에 대한 의지의 부정에 있어서의 제1보이다. 동정은 금욕에 의해 개인적인 생명을 초월한 의지 긍정을 부정하고 동시에 이 신체의 생명과 더불어 나타나는 의지도 또한 소멸한다는 것을 나타낸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60쪽)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금지한다. 자기 육체를 파괴함으로써 자살을 시도하는 이는 단지 삶의 부정에 이를 뿐 개체의 살려는 의지의 부정에 이르지는 못하며, 따라서 아직도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요청되는 것은 생물학적 자살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자살, 혹은 의지의 폐기다. 의지를 부정하는 인간은 아직 살아있는 육체를 인색하게 양육하며, 결국 죽음은 의지의 발현인 육체를 부수러 찾아온다. 그러나 그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죽음은 대망하던 해탈로서, 대단히 환영받고 기꺼이 받아들여진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63쪽)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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