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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 비관론_기술의 발전에 따른 허무주의

by 잡다정보 2025. 2. 1.

기술 세계는 아무 목적도 없는 허무주의다.

기술의 발전과 허무주의


19세기에 실증주의란 이름으로 만개한 과학은 산업과 연결되면서 기술 공학을 통해 정치적·사회적 위기를 해결하고 인류 사회를 총체적으로 개혁하려는 생각의 토대가 되었다. 즉 과학과 산업이 과거의 종교적·초월적 이념을 대체했다. 인간은 전적으로 자연에서 생겨나며 인간의 행위도 다른 사물들과 같은 사실 체계에 속하므로 과학은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에 확실성을 제공하는 이념이자 목적이 된다. 과학과 산업의 발전이 인간의 진보와 문명이라는 목적을 구성하게 된다. 사실 18~19세기의 상황은 이미 기술 세계의 준비과정이었다. 질서, 조화, 신 등의 초월적 규범이 힘을 잃으면서 진보와 과학에 대한 믿음, 역사의 발전에 대한 신뢰, 성공에 대한 숭배, 또는 더 평범하게 말하면 물질적 안전과 심리적 안락이 삶의 공허를 채워줄 대상으로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기술 세계는 이런 허무주의의 단초가 더 발전하여 극단화된 것이다. 기술 세계는 아무 목적도 없는 허무주의다. 혹시라도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수단을 강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글로벌 자유주의 경제는 끝없는 생산력 증가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 위해 생산을 잠시 멈출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경제는 무한한 경쟁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며, 발전의 중단은 곧 퇴보고 궤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직 발전을 위한 발전이 관건이다. 사실 과학과 자본주의의 목적을 과학과 자본주의 내에서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과학이나 자본주의에 목적과 의미를 부과하려면 공동선을 다시 규정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과 윤리의 개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철학적 논쟁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다시금 불확실한 이념 간의 반목과 대립을 야기할 것이고 인류는 또 다른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결국 현재로서 확실하고 안전한 방식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때 요구되는 것은 능력과 힘뿐이다. 삶, 생존, 성공은 유사어가 되고, “좋은 삶”은 “성공한 삶”에 자리를 내준다.


현대사회의 부작용


그러나 목적과 의미가 없는 세계에서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것은 권태와 진부함이다. 현대사회에서 무한정한 생산과 소비가 진부한 반복을 상징한다. 생산과 소비의 한계는 오직 수단의 한계일 뿐이다. 더 심각한 일은 소비가 질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경쟁 사회는 질투 현상을 고조시킨다. 전통사회에서는 위계질서를 숙명으로 받아들였었지만 오늘날은 “원칙적으로” 만인의 평등이 보장되어 있다. 그러면 출발점은 같은데 왜 도착점은 이리도 다른 것인가? 자신의 실패와 능력 부족에 대한 자책은 성공한 자들에게서 비도덕적인 “불의”를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귀결된다. 이런 상황에서 질시, 갈등, 한탄, 맹목적 증오가 확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아가 타인의 성공에 대한 확인은 나 자신이 “현재” 잘못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게다가 이제 과거처럼 이 세상을 넘어선 천명, 이념, 목적, 신 등과 같은 출구도 없다. 오로지 더 강해져야 할 뿐이다. 그래서 가장 무의미하고 천박한 것들도 소비를 통해 극복할 질투의 대상이 된다. 결국 성공과 소비, 무능력과 실패, 질시와 모방, 범죄와 처벌의 무한 반복이 현대사회의 모습이다.


현대사회의 양상을 생각해보면 쇼펜하우어의 서슬 퍼런 독설이 설득력을 갖기 시작한다. 문명이 발달하건 아니건 간에 우리의 삶은 고통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행복의 소망은 결핍에서 오고 결핍의 충족은 권태를 부른다. 권태는 또 다른 욕구를 불러오고 소망과 결핍의 사슬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런 사슬을 잘 들여다보면 결국 삶은 고통의 연속에 불과하다. 행복의 추구는 결핍의 이면이므로 고통이고 권태는 무기력과 또 다른 결핍의 상태이므로 역시 고통이다. 고통은 단지 모습을 바꿀 뿐이다.


“고뇌를 추방하려는 쉴 새 없는 노력은, 고뇌의 모습을 바꾸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고뇌의 모습이란 본래 결핍, 궁핍, 생의 유지를 위한 근심이다. 극히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만일 다행히도 이러한 모습을 한 고통을 추방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고통은 곧 무수한 다른 모습을 취하고 나타나, 연령이나 사정에 따라 달라지고, 성욕, 열렬한 애정, 질투, 선망, 증오, 불안, 명예욕, 금전욕, 병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고통이 급기야 다른 어떠한 모습도 취할 여지가 없게 되면, 혐오와 권태라는 슬픈 회색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또 이것을 피하려고 하여 여러 가지를 시도한다. 결국 이 혐오와 권태를 물리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전의 여러 모습의 고통 중의 하나에 다시 빠져 처음부터 괴로운 춤을 다시 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방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88쪽)


삶이 만만해 보인다면 병원 중환자실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이 좋다. 병원 복도 곳곳에서 훌쩍거리는 사람들을 보고도 삶의 고통이 멀게 느껴진다면, 머지않아 친지의 시신을 맞닥뜨릴 때 생각이 바뀔 것이다. 낙관론은 “인류의 괴로움에 대한 가혹한 조롱”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01쪽)


행복은 없다. 행복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소극적인 것일 뿐이다. 행복은 고통의 부재에 불과하다. 지속적인 긴장과 고통에서 탈피한 잠깐의 해방을 행복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 작품도 행복을 얻기 위한 투쟁, 고통, 노력을 묘사하는 데 가장 큰 힘을 기울인다. 우리가 즐겨보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갈등과 고통의 과정이 빠지면 스토리가 성립되는가? 최고의 해피엔딩 영화라고 해도 결말 부분에서 행복에 도달하면 극은 행복의 순간을 길게 묘사하기는커녕 순식간에 종결된다. 쇼펜하우어의 천재적인 통찰에 따르면, 그런 예술 작품이 주인공을 허다한 난관과 위험을 거쳐 목표에 이르게 하자마자 서둘러 막을 내려 버리는 이유는 “그가 거기서 행복을 찾는다고 망상하고 있었던 빛나는 목표는 그를 조롱한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는 그 목표에 도달한 후에도 전보다 행복해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려내는 것밖에는 별도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94쪽)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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