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
애호주의자의 태도를 잘 살펴보면 그 속에는 삶에 대한 비관이 엿보인다. 나와 대상을 번갈아 가며 없애려는 시도에는 불만족이 숨어있다. 애호주의자의 모순된 태도에는 그가 행복을 추구하지만 계속 행복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어쩌면 그는 순간적인 기쁨을 미끼로 고통을 찾아다니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상대주의, 회의론, 애호주의 등 의심에 기반을 둔 태도들에는 삶과 세계의 고통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이 똬리를 틀고 있다. 나아가 삶의 고통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불만은 커질 수 있다. 그런데 삶은 원래 불만족스러운 것은 아닐까? 고통 이 삶의 본질이라면 우리의 관점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고통스럽다 고로 존재한다.’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요인은 너무도 많다. 수천 년의 역사 속에 숱하게 나타난 전쟁, 살상, 고문, 가난, 탄압, 기만 등에 곧바로 의거하는 것은 진부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역사가 발전해 왔다는 관점에서 오늘날의 행복과 자유는 양적·질적으로 최고의 수준이라고 가정해 보고 논의를 시작해보자. 우선 극도로 발전한 오늘날의 과학 기술과 자본주의의 이면에 허무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뤽 페리(Luc Ferry)가 잘 분석했듯이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대다수가 명확한 목적 없이 성공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정해진 규범, 목적 또는 이념이 부재한 현대 사회에서 행복이나 자유는 매우 구체적인 물질적 대상으로 환원된 사회적 성공으로 나타난다. 풍부한 돈, 고급주택, 자동차, 명품, 보석, 해외여행, 안락한 전원생활 등 많은 것들이 성공과 관련된 평범한 환상 대상들이다. 연예인, 유명 운동선수, 기업인 등 흔히 말하는 “성공한” 인물들은 삶의 모델이 되어버렸다. 이제 성공 자체가 삶의 이상을 대체했기 때문에 능력, 수완, 성공이 최상의 가치다. 성공하지 못한 자들은 우리가 모르는 익명의 사람들에 불과하고 중요하지도 않다.
현대 사회의 허무주의
과거처럼 고정된 규범이 있어서 우리 삶의 지표가 되어준다면 아마도 삶의 허무는 약화되고 의미의 추구는 강화될 것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하늘의 뜻을 따르는 성인군자나 현자 등의 위상은 삶의 기준이자 모범이었다. 특히나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유교사회에서 삶의 기준들은 공동체에 의해 확고하게 규정되었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까지 세세한 규범들이 스며있어서 삶의 의미에 대한 불확실성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서양도 마찬가지다. ‘좋은 삶’(good life)은 초월적 원리, 즉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월적 원리를 통해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삶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려면 인간을 넘어선 기준이 필요했다. 질서, 조화, 신 등의 가치가 기준의 역할을 담당했다. 최근까지도 이런 종교적 기준은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에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천명(天命)이나 “초-인간”이나 전체주의적 이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물론 종교인들이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 차원에 속한 일이다. 사회에서 자기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타인들에게 강요했다가는 부담스러운 사람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이제 세속의 삶과 인간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고 과거의 초월적 기준들, 이데아, 조화(cosmos), 신, 천명, 공산당, 혁명 등은 공상적이고 독단적인 믿음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오늘날 삶의 성공과 실패는 초월성의 척도에 따라 평가될 수 없다. 이제 초월적 규범은 작동하지 않으므로 좋은 삶의 기준은 성공이 되어버린다. 하이데거는 초월적 이념이나 목적보다는 힘과 수단이 우월한 가치로서 등장한 현대 사회를 “기술 세계”라고 불렀다. 기술은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수단의 힘에만 의거한다. 기술 세계 개념은 데카르트의 근대과학을 통해 열리고 19세기에 만개했지만 오늘날과 달리 당시의 과학은 자유와 행복, 진보, 문명 등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과거의 과학적 세계관은 목적을 배제하고 수단만을 인정하는 오늘날의 기술 세계에 비해 순진한 입장이라고 하겠다.
세계에서 본격적으로 목적을 제거하기 시작한 것은 데카르트다. 데카르트에게 자연 자체는 감탄스러운 것이 전혀 없다. 자연은 가공할 수 있는 물질로서 순수한 기술적 지배 대상이다. 물질세계 또는 자연에 가치와 목적이 없다는 점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계는 물체들로 꽉 찬 공간이며 우주의 시작 때에 주어진 운동량이 계속 보존된다. 물리 세계의 모든 질적·양적 변화는 단지 크기, 모양, 운동의 특성을 가진 물질 속에서 일어나는 충격들에 의해 설명된다.
“나는 사람들이 기하학에서 크기라고 부르며 기하학적 증명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 즉 모든 방식으로 나누어질 수 있고 모양을 지닐 수 있고 운동할 수 있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물질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다.”(철학의 원리, 2부, 64절)
그런데 데카르트가 자연에서 목적성을 배제하고 자연을 상호작용하는 단순한 물질 덩어리로 간주한다면, 이는 물질세계를 효과적으로 지배함으로써 인간 삶의 유용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 우리는 삶에 아주 유용한 여러 지식에 이를 수 있고, 강단에서 가르치는 사변적인 철학 대신에 실제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로써 불, 물, 공기, 별, 하늘 및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물체의 힘과 작용을 – 마치 우리가 우리 장인의 온갖 기교를 알 듯이 – 판명하게 앎으로써 장인처럼 이 모든 것을 적절한 곳에 사용하고,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된다는 것이다.”(방법서설 제6부)
다만 이런 계획은 자연 안에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에게 속하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자연에 설정하기 위해 우선 자연에서 목적성을 박탈해야 했다. 즉 자연 자체에는, 그리고 자연을 중립적으로 분석하고 규정하는 과학에는 의미와 가치의 자리가 없다. 그러나 자연의 막대한 힘에 억눌렸던 근대인은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개선하려는 목적을 자연에 설정했다.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 철학하는 태도_상대주의와 애호주의 (0) | 2025.02.01 |
---|---|
[철학] 철학하는 태도_상대주의와 애호주의(2) (0) | 2025.02.01 |
[철학] 비관론_기술의 발전에 따른 허무주의 (0) | 2025.02.01 |
[철학] 비관론_철학적 구조_의지 (0) | 2025.02.01 |
[철학] 비관론_쇼펜하우어의 의지 (0) | 2025.01.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