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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 비관론_쇼펜하우어의 의지

by 잡다정보 2025. 1. 30.

모든 존재하는 것은 주관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


쇼펜하우어가 ‘의지’ 개념을 이성이나 표상 등의 인식 능력보다 상위의 원리로 주장한 것은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특히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충동, 욕망, 본능으로 점철된 존재라는 관점은 서양의 이성중심주의와 정면으로 대립된다. 우리의 지성적 판단의 배후에 성욕 같은 본능과 욕망이 숨어있다고 갈파하는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서양철학을 망치로 두드려 부숴버린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에 선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철학사에 대한 지식으로 범위를 넓히지 말고 우리의 주제인 비관론에 집중하도록 하자. 지금까지 우리는 비관론의 창시자인 쇼펜하우어가 자신만의 방식대로 칸트와 플라톤을 극복 또는 종합함으로써 자신의 철학 체계를 건립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의 철학 체계를 이루는 두 핵심 개념은 그의 주저 제목이 나타내듯이 의지와 표상이다. 세계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의지가 객관적 실재라면, 인식주체를 거쳐 가공된 세계, 즉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주관성의 결과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의지와 표상으로써의 세계, 45쪽)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인간의 인식 작용을 거친 상대적 실재, 즉 현상일 뿐이다. 대중의 소박한 믿음에 따르면 외부 세계는 감각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며 따라서 외부 세계의 실재를 인정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외부 세계가 우리의 의식에 현상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가 외부 세계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속에 자리매김하고 외부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인과성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공간 속의 한 물체는 다른 물체에 의해 결정되며, 이를 ‘상황’(situation)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시간 속의 한순간은 선행하는 다른 순간들에 의해 결정되며, 이를 ‘계기’(succession)라 한다. 이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수많은 대상의 상호관계가 인과율을 구성하는 표상의 세계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성을 쇼펜하우어는 인식의 형식 혹은 충족이유율이라고 명명한다. 표상은 충족이유율에 불과하다. 세계는 표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은 주관에 의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그러한 주관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인식하는 한에서만 그런 것이고, 인식의 대상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우리 신체는 이미 객관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체 그 자체를 이러한 입장에서 표상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신체는 다른 객관들과 같은 객관이며, 비록 직접적 객관이라고는 하더라도, 역시 객관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모든 대상과 마찬가지로 다수성을 일으키는 모든 인식의 형식, 즉 시간과 공간 속에 있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7쪽)


쇼펜하우어의 이분법적 세계관


이처럼 쇼펜하우어는 칸트와 플라톤의 영향을 받고 또 그것을 극복하면서 자신만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구축했다. 그는 “의지”를 세계의 궁극적 원리로 보는 동시에, 감각 세계에 대한 칸트의 개념을 플라톤의 현상 개념과 접근시킴으로써 “표상”을 의지의 객관화로 규정한다. 쇼펜하우어의 체계는 칸트의 관념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양 체계 사이에는 환원 불가능한 차이가 존재한다. 칸트는 감성적 직관의 대상으로서의 객관적 실재, 즉 물자체를 인정하는 반면, 쇼펜하우어는 그런 감성적 직관을 일종의 식물적 지각으로 보고 직관은 지성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감각은 우리에게 느낌만을 제공하며 이런 느낌은 아직 직관이 아니다. 감각은 유기체적인 육체가 겪는 작용을 느끼도록 해주며, 우리 육체의 이런 변용을 어떤 원인과 관계시키는 것은 지성이다. 바로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그 원인을 대상들로서 간주하는 직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지성의 이 같은 작용이 없으면 즉각적인 대상에 대한 어렴풋하고 식물적인 것에 불과한 의식만이 있게 될 것이다. 지성이 결과를 원인에 관계시킬 때 비로소 세계는 시간과 공간 속에 펼쳐진 대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의지”라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제외한 모든 것은 주관적 인식 작용의 결과, 즉 “표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인도 전통의 마야 (Maya), 즉 환상의 베일과 동일시한다. 의지는 세계의 본질이며 표상은 의지의 대상화다.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와 표상된 세계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의지와 표상, 물 자체와 현상, 자유와 필연의 두 얼굴이다. 그런데 의지를 실재로서 인식하는 과정은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인정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냉철한 정신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순수한 정신적 존재 또는 몸 없는 천사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개체로서 세계에 속해 있다. 세계 전체에 대한 표상을 가능케 하는 인식은 육체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육체의 변용은 지성이 세계를 직관 대상으로 삼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육체는 두 얼굴을 지닌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편으로 육체는 다른 물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표상이고 대상이다. 다른 한편으로 육체는 순수한 내적 원리인 의지의 즉각적 발현이다. 이때 육체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지의 행위와 육체의 동작이 인과관계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의지의 행위는 육체의 운동 자체다. 의지의 행위와 육체의 운동은 인과율에 의해 상호 연결된 두 대상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주어진 동일한 사태다. 즉 의지로서의 육체는 힘의 즉각적 발현이고 표상으로서의 육체는 의지가 객관화된 형태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 세계에 속에서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살게 되는가? 우선 의지는 물자체로서 인과율에 속하지 않는다. 의지는 원인이 없이 원할 따름이다. 의지는 의지를 멈추게 할 결정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의지의 본질은 단지 원하는 것이다. “왜 원하는가?”라는 질문은 불합리한 질문이다.

의지는 영원한 생성이며 끝없는 흐름일 뿐이다. 의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 원한다는 사태 자체만이 중요하다. 그러나 의지의 삶을 더 깊이 살펴보면 의지는 영원히 결정적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의지는 끊임없이 원하도록 선고받았지만 의지 행위의 무용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간혹 삶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의지와 표상의 두 얼굴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서히 자신의 존재, 즉 자신의 의지 자체에 의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숙명을 자각하기 전까지 현 상황에서 느끼는 위기감은 고통의 서막에 불과할지 모른다. 앞서 우리는 삶의 허무주의와 고통을 어느 정도 경험적인 차원에서 서술했었다. 이제 비관론의 철학적 구조가 밝혀졌으므로 비관론의 실체를 규명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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