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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 철학하는 태도_상대주의와 애호주의(2)

by 잡다정보 2025. 2. 1.

애호주의의 모순

 

애호주의는 형이상학과 윤리학 모두 확고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먼저 그 어떤 형이상학 체계도 절대적 이론을 확립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인류가 제안한 다양한 체계들 사이를 오가며 그 의미들을 번갈아 향유하는 것으로 족하다. 또한 그 어떤 윤리도 절대적 규범을 세우지 못했다. 그렇다면 특정한 규범 체계에 매이지 않고서 모든 윤리 체계들을 경험해 보는 것이 삶의 지혜일 것이다. 요컨대 제대로 사는 비결은 서로 모순이 되는 형이상학들을 포함한 모든 세계관을 이해하고, 서로 상충하는 윤리 규범들을 포함한 모든 인생관을 경험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삶을 향유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형이상학 체계나 절대적인 삶의 규범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삶에 답이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다양성을 즐길 것을 제안하는 입장은 타당한가? 독단론의 일방적인 관점을 경계해야 했듯이 애호주의에 은폐된 가설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애호주의는 삶의 책임, 의미, 목적 같은 진지한 문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부담을 없애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다양한 대상들 속에 자신을 함몰시킴으로써 확정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주체적 의지를 폐지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애호주의자의 태도에는 모순이 발견된다. 언뜻 보면 애호주의자는 마치 아무 형이상학 체계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체계들을 배제하는 체계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체계를 인정한다. 달리 말하면 그가 선호하는 체계가 이미 고정되어 있다. 윤리 규범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완전한 충실성을 요구하는 규범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규범들을 받아들인다. 달리 말하면 그는 자신이 따르는 규범은 잠정적이라는 것, 그것을 재고할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을 끝까지 경험하지는 않겠다는 결정을 미리 해놓고 있다.


애호주의자의 이런 결정은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유지하려는 태도다. 그는 한 체계 (또는 규범)에 고정되지 않고 다른 체계들로 이행하는데, 이는 특정 체계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는 움직임이다. 즉 애호주의자는 특정 체계보다는 자기 자신을 선호하기 때문에 여러 체계로 옮겨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 옮겨 가는 것 자체에 이미 애호주의자의 불만족이 내포된 것 아닌가? 그는 모든 것을 향유하겠다고 하지만, 실은 한 가지도 향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호주의의 이면에는 이미 결정된 이론이 존재한다. 어떤 체계도 확정적인 관점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은 피상적인 경험적 확인일뿐 엄밀하게 검증된 것은 아니다. 애호주의자에게는 무지의 지를 인정하면서 확실성을 찾아 나서는 소크라테스의 겸허함도 없고, 과거의 모든 체계를 익히고 거기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려는 공자의 진중함도 없다. 애호주의자는 삶에 대한 답은 없을 것이라는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있을 뿐이다. 그의 무지는 의도된 무지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의도된 무지는 무지가 아니다. 깊이 생각된 무지는 자연적인 호기심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것일 뿐이다. 애호주의자가 즐기겠다는 형이상학적 체계와 삶의 경험은 결론적이지 않기 때문에 온전하지도 않다. 애호주의자는 이미 어떤 구조가 재현될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삶의 경험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삶의 경험은 일단 해보는 것이고 거기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애호주의자의 태도


애호주의의 은밀한 가설은 무엇인가? 그의 가설은 어떤 깊은 성향에 근거하고 있는가? 마치 모든 것의 공허함을 아는 듯이, 그것을 체험하는 듯이 (비록 그것을 체험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놀이하듯 즐기는 것은 모든 문제를 제거하겠다는 명목하에 이미 모든 문제에 대해 선입견을 정립해 놓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각본이 있는 드라마인 것처럼 예단하는 것이다. 애호주의의 가설은 자의적인 예상, 예단, 예견을 통해 실재도 없고 진리도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애호주의의 인위적 태도가 드러나고 가면이 벗겨지는 것은 바로 그의 완강함과 고집 앞에서다. 애호주의자의 태도는 가장 넓고 관용적 정신인 것 같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편협함이다. 애호주의자는 관대하고 자유로운 정신으로서 배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가 은밀하게 지키고 있는 행동 구조만은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결단을 내려놓고 있다. 그것만은 의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이미 행동 패턴은 정해져 있지만, 오직 그것을 숨기기 위해 이리저리 떠도는 것이다.


애호주의자의 태도에 대해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이 있다. 그는 특정 지식, 특정 경험의 본질에까지는 접근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무엇을 증오하는가? 애호주의자는 항상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한다. 그는 사랑하는 그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을 알지 못한다. 애호주의자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쾌락과 불쾌 사이를 오가는 반복 강박 성향을 나타낸다. 애호주의자는 그가 비판하는 보통 사람들, 어떤 고정관념과 관습, 태도, 사상을 가진 바로 그들 이상으로 고정된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만의 존재 방식, 사유 방식, 의지 방식, 배제방식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을 숨기고 있는 독단론자다.


애호주의자는 특정 지식과 경험의 일정 선에서 멈출 결정을 해놓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느껴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곧바로 다른 것들로 옮겨 다닐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삶의 방식을 향유한다고 말한다. 철학, 과학, 문학, 종교, 예술, 그리고 각각에서 파생되는 무수한 분파 등 이리저리 옮겨 다닐 대상은 무한정하지 않은가? 그래서 어느 학파에 물들지 않고 복합적이고 무진장한 태도를 가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애호주의자는 ‘나의 학설은 바로 학설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의 학설이다. 그에게는 이미 한 체계의 상표가 붙는다. 그것이 싫다고 해도 이미 그의 태도는 규정되어 있다. 그의 목적은 있다. 그것은 지성적인 형이상학 체계를 탐미적 무정부상태로 대체하고 윤리 규범은 무한정한 판타지로 대체하는 것이다. 대상도 주체도 번갈아 가며 제거하려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시도에 성공하지도 못하면서 계속 성공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의 태도는 고집쟁이, 아집, 불통의 태도다. 애호주의에는 논리적 결함이 있을 뿐 아니라, 비록 진단은 힘들지만 분명한 병적 상태가 엿보인다.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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