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비관론 체계
여느 철학 체계들과 마찬가지로 쇼펜하우어의 비관론 체계도 여러 사상과 관계를 맺고 진화과정을 겪으며 완성되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상은 없다. 쇼펜하우어 스스로 단언하듯이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칸트의 철학이다. 심지어 그는 칸트와 자신 사이에는 아무도 없다고 선언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 이후 독일철학의 세 거두인 피히테, 셸링, 헤겔을 무로 환원시켜 버리는 것이다. “참되고 진지한 철학은 칸트가 남긴 채로 그대로 있다. 여하간 나는 철학에서 칸트와 나 사이에 최소한의 진전이라도 있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 철학자를 “세 명의 커다란 궤 변론자들”로 불렀고 평생 이들에게 욕설과 독설을 퍼부었지만 칸트에 대해서는 각별한 존경심을 표했다. 비록 쇼펜하우어는 칸트철학에 대한 비판도 끊임없이 진행했지만 칸트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선명하게 인정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에 대한 별도의 연구를 자신 주저의 부록으로 첨부했을 정도로 칸트철학과 관계가 깊었다. 칸트철학의 핵심은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식주체에서 나타나는 현상뿐이며 존재 자체는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칸트는 존재, 즉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한 동시에 물자체의 실재를 현상의 원인으로서 인정했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사상형성 초기에는 칸트적 물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즉, 그는 칸트가 현상의 원인으로서의 물자체, 인식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자체의 실재성을 인정했다는 것은 불가해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물자체야말로 칸트철학의 취약한 부분임을 강조했다.
“칸트가 물자체 개념을 더 자세히 고찰하지 않았다는 점, 이인칭과 삼인칭으로 사용된 존재는 감각에 의해 인식된 존재만을 의미할 수밖에 없으며, 이어서 이 존재로부터 감각에 의해 인식된 것을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 즉 물자체는 제로(0)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그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은 불가해한 일이다.”(유고, III, 35)
이렇게 볼 때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시작한 독일관념론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견고한 형이상학의 토대 위에 윤리학을 구축하고자 했기 때문에 플라톤 철학의 이데아 이론에 매료되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매개로 물자체 개념을 인정하기 시작하고 나아가 플라톤의 이데아를 칸트의 물자체와 동일시하게 된다. 이데아와 물자체 모두 감각 및 주관성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물자체와 이데아 모두 시간과 공간, 복수성, 변화, 시작과 끝으로부터 자유로운 실체다.
“실재적인 것은 감각에 포섭되는 사물들이 아니라 이데아들, 즉 영원한 형상들이라는 플라톤의 학설은 시간과 공간이 물자체에 속하지 않고 단지 내 직관의 형식일 뿐이라는 칸트 학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단일한 이데아가 서로 분리된 다수의 개체로 분할되는 것은 오직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유고, IV, 24)
의지
주목할 점은 물자체가 단일하다고 할 때 이는 동일한 종(種)에 속하는 개체들과 관련하여 그런 것이다. 플라톤에서 복수의 이데아들이 있듯이 복수의 물자체들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양이의 이데아나 물자체는 여러 개별적인 고양이들과 관련하여 단일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개념을 개입시키면서 자신의 철학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그 개념이란 바로 의지다. 그는 의지를 물자체와 일치시키면서 플라톤의 이데아를 의지의 아래 단계로 강등시킨다.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은 복수의 종(種)을 포함하므로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단일한 형이상학적 원리가 되기는 힘들었다. 단일한 형이상학적 원리를 견고하게 세우려는 쇼펜하우어의 성향은 결국 그의 독창적 철학 체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물자체를 “의지”로 간주하고 이데아들은 의지의 가장 직접적인 객관화 또는 제일의 대상적 발현으로 규정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자신의 철학 체계를 건립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그가 서양철학의 두 거인이라고 명명한 플라톤과 칸트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 ‘의지’ 개념의 개입을 통해 자기 사상의 건립을 위한 적합한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이제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와 칸트의 물자체의 관계는 다음처럼 정식화된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칸트의 물자체는 전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데아는 물자체의 직접적이고 또 그러므로 적절한 객관성인 것이다. 그런데 물자체 그것은 ‘의지’, 즉 아직 객관화되지 않고 표상으로 되지 않은 의지인 것이다.”(231쪽)
물론 의지의 개념도 칸트철학에서 그 단초가 주어진 것은 사실이다. 칸트는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물자체가 아닌 현상뿐이라는 점을 확립하지만, 그런 순수이성 또는 이론적 이성이 아닌 실천적 이성에 의해 물자체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의지는 바로 실천적 이성의 다른 이름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의지의 개념을 단호하게 배척한다. 의지는 이론적이건 실천적이건 간에 이성이 아니다. 이성은 추상적인 인식 능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의지는 오히려 비합리적인 힘이자 에너지 자체로서 세계의 실재 자체를 구성하는 형이상학적 원리다. 세계의 궁극적 원리는 만물에 깃들어 있는 유일한 보편의지다. 인식주체에 의해 굴절됨 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력이 의지다. 광물, 식물, 동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우주 전체의 근원적 생명력을 구성하는 힘이 바로 의지인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원리인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독일 어 Wille를 사용했는데, 사실 Kraft가 더 적합할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Wille(영어 will, 프랑스어 volonté)는 일반적으로 ‘의도’, ‘의향’ 등 지성적 작용이 개입된 정신적 능력인 반면, Kraft는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 정신적, 물리적 힘, 자연적 에너지, 역량, 기세 등의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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