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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 철학하는 태도_철학이란 무엇인가?

by 잡다정보 2025. 2. 2.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우선 ‘철학’이란 단어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학문 용어가 그렇듯이 ‘철학’은 한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적인 철학 사전이 아닌 일반 사전은 보통 두 가지 정도의 의미를 제시한다.

  • 철학(哲學)
    •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 자기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 세계관, 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

첫 번째 의미는 하나의 학문으로서 ‘철학’이 탐구하는 내용을 나타낸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 “삶의 본질”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삶의 본질”이라는 표현은 삶을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답하려는 철학의 관점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전적 의미를 봤을 때, ‘철학’은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의 의미와 삶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밝히려는 학문이다. 포괄적인 의미가 담긴 나름대로 괜찮은 정의다.

 

다만 몇몇 문제가 남는다. 우선 이런 학문이 왜 “철”학인가? “경제학”은 경제를 연구하고 사회학은 사회를 연구하므로 이 단어들은 연구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哲’은 무슨 의미인가? ‘철’은 ‘밝다’, ‘슬기롭다’, ‘알다’ 정도의 의미다. 밝음을 연구하는 학문? 앎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뜻인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철학’은 단지 연구하는 학문인가? 인간과 세계의 근본원리, 삶의 본질을 잘 연구한 사람은 그래서 좋은 사람인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사회만 보아도 많이 배운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대단한 수준인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여하튼 철학을 인간과 세계의 근본원리, 삶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만 정의하면 철학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삶 자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두 번째 의미가 이런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명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두 번째 정의를 다시 음미해보자. “자기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 세계관, 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 철학의 이와 같은 의미는 일상생활에서 사용될 뿐 아니라 언론에서도 이런 의미로서 ‘철학’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확고한 기준을 가진 상태를 말할 때 ‘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철학이 없다고 한탄하면서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훈계하기도 한다. 망나니처럼 사는 사람을 비판할 때도 ‘저 사람은 철학이 없어서 그래’라고 말한다. 국정 운영이 혼란할 때 대통령의 ‘국정 철학’이 절실하고, 정치판이 엉망일 때 ‘철학이 부족한 국회의원들’ 때문이고, 경제가 안 좋을 때 ‘경영 철학’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철학’이 표현된다. 나아가 어떤 개별적인 사안뿐 아니라 삶과 세계 전체에 대한 정확한 입장이 서 있을 때, 우리는 ‘철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두 번째 의미에서는 ‘연구’나 ‘학문’ 따위의 뜻이 명확히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단지 연구가 아니라 삶의 방식 또는 태도 자체와 더 밀접하게 연결된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만 ‘경험’에서 얻은 관점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다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여기서도 ‘哲’은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특정한 분야에 ‘밝은’, 그래서 ‘슬기롭고’ 잘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철학이 있는 사람’이 인생을 잘 가꾸어가고 있는 사람인가?

 

위의 두 의미를 모두 종합할 때 ‘철학’의 의미가 어느 정도 드러날 것이다. 잠시 후 두 의미를 연결할 것이다. 그전에 ‘철학’이란 단어와 관련하여서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이 있다. 요즘은 좀 덜 한 것 같기도 하지만,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아직도 많은 분이 “점 볼 줄 아느냐?”라고 묻곤 한다. 아마도 이는 꽤 많은 사람이 ‘철학’이라 는 것을 인생 자체에 대한 고민과 답의 의미로 이해하거나, 도처에 발견되는 ‘철학관’이라는 명칭이 각인되어 ‘철학’과 점(占)의 상관성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과 점(占)은 관계가 있는가? 이 문제도 실은 ‘철학’의 의미가 밝혀졌을 때 답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역학(易學), 사주(四柱), 명리(命理)가 하나의 온전한 학문인지 아닌지는 여기서 상세히 고찰할 대상은 아니다. 다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명리학이 과거시험의 한 분과인 잡과(雜科)에 포함되었던 과목이라는 점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의학이 많은 학생의 선망 학과가 되었듯이 명리학도 미래에 정식과목으로 채택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명리학을 초등학교부터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하는 유명 작가도 있고, 정통 동양사상을 전공하다가 명리학을 하나의 온전한 학문체계로 인식하고 관련 논문도 발표하는 동시에 전업 역술인으로 활동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철학이 사주명리학과 관련을 가진 것, 또는 관련을 가진다고 생각되기 시작한 것은 유례가 있다. 1960년대부터 우리 사회에 근대화 운동이 불같이 일어날 때 과거 전통의 많은 부분이 ‘미신’으로 간주하면서 된서리를 맞았다. 점을 보는 것도 그중 하나였고 역술인들은 ‘점집’이라는 간판을 내리고 다른 단어를 찾아내야 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이때 등장한 단어가 바로 ‘철학’이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철학관’ 또는 ‘철학원’이 나타난 것이다. 또는 점집이 철학관으로 포장을 바꾼 것이다.

 

철학이란 단어의 여러 의미를 언급했는데, 아직도 사전적인 의미로는 ‘철학’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어 보인다. 철학이 무엇인지 실마리를 풀어보기 위해서는 ‘철학’이란 단어 자체의 형성에 유래가 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동방에 ‘철학’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물론 ‘밝다’라는 뜻의 哲과 ‘배움’의 뜻을 가진 學은 당연히 있었지만, 두 글자를 합해서 하나의 단어로 만들고 특정 분과학문의 이름으로 사용된 적은 없었다. 서양에서 ‘철학’을 의미하는 단어 philosophia를 일본 메이지 시대의 학자가 ‘철학’(哲學)이라는 단어로 옮겼다.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니시 아마네 (西周, 1829-1897)가 ‘철학’의 작명자다. 이것이 동방에서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단어의 기원이다. 오늘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서도 ‘철학’이라는 단어가 통용되고 있지만, 이 단어가 서양어의 번역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

서양인들이 동양에 오기 시작한 것은 1500년대 후반부터다. 이미 400년을 훌쩍 넘어선 긴 역사다. 가톨릭 종교를 전파하려고 서양 선교사들이 동방에 와서 동서교류가 이루어진 역사는 평생 연구해야 할 풍요롭고 방대한 주제다. 그런데 서양선교사가 philosophia를 중국인들에게 전하려다가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니시 아마네 등의 일본인들이 서양 학문을 습득하는 차원에서 수많은 단어를 개발한 것은 분명 높이 살 만하지만, ‘철학’의 의미를 깊이 파악하려면 서양선교사들이 philosophia를 ‘哲學’ 같은 용어로 불분명하게 옮기지 못하고 고민한 사실을 오히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서양선교사들은 결국 philosophia에 해당하는 중국어를 찾지 못하고 중국 발음을 빌려 표현하기로 했다. 그래서 ‘필-로-소-피-아’를 발음하기 위한 5글자 또는 5음절이 필요했다. 선택된 글자들은 ‘비록소비아’(斐祿所費亞)였다. 오늘날 중국어에서 Coca Cola(코카콜라)를 ‘크어코우크얼러’(可口可乐, ke kou ke le)로 음역 하듯이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Giulio Aleni, 1582-1649)가 라틴어 philosophia를 ‘페 일루쑤오페이야’(斐祿所費亞 fei lu suo fei ya)로 음역한 것이다. 서양에서 통용되는 philosophia에 해당하는 단어가 중국 학문에는 없다고 판단하여 음역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서양 고유의 용어를 한자로 옮기기 위해 서양 선교사들이 고민한 사안은 이 외에도 많다. 16세기말 선교를 위해 중국에 도착한 예수회 신부들이 오늘날 통용되는 ‘신(神)’에 해당하는 ‘Deus’를 한자로 옮기기 위해 고심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상제, 천, 혼, 리, 태극(太極) 등 여러 단어가 후보에 올랐다가 결국 ‘천주’(天主)가 채택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동료 신부들은 그들과 교류했던 중국 청년이 판자 위에 써 놓은 ‘天主’를 보고 적합한 단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Deus’의 번역어로 채택했다. 만일 ‘태극’이 선택되었다면 가톨릭은 천주교가 아니라 ‘태극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천주’가 선택된 이후 ‘천주’라는 번역어의 적합성 여부를 둘러싸고 유럽 학자들 사이에 지루한 논쟁이 이어졌다. 이 같은 언어 논쟁 및 제사와 관련된 논쟁까지 겹 쳐지면서 서양과 중국 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정치적 쟁점으로 변해갔다. 결국 ‘전례 논쟁’이라 불리는 이 갈등은 중국 황제와 로마 교황청 간의 대립으로 확대되고 북경에 설립된 예수회가 해체되는 결과까지 낳았다.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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