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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 낙관론_도덕적 악과 물리적 악

by 잡다정보 2025. 1. 29.

악의 원인은 신의 의지에 있지 않다.

도덕적 악과 물리적 악

도덕적 악과 물리적 악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은 형이상학적 악에서 비롯된다. 도덕적 악은 죄이고 물리적 악은 고통이다. 그러나 악은 결국 신이 최선의 세계를 실현하는 차원에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악을 과장하거나 신의 정의(正義)에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도덕적 악이 죄라고 할 때, 신이 죄를 허용하는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를 위해서 또는 그 죄로 인한 결과보다 더 나쁜 결과를 막기 위해서일 뿐이다. 즉 신은 선을 직접적으로 원했고 악은 최선을 위해 부수적으로 허용했을 뿐이다. 악은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해 허용되었을 뿐이다. 타인의 악을 막기 위해 자기 자신이 죄를 범해야 한다면 타인의 악을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악을 막기 위해 신의 완전성이 손상되어야 한다면 인간의 악을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국 악은 선을 위한 부수적인 결함일 뿐이다.


물리적 악, 즉 아픔, 고통, 불행은 도덕적 악의 귀결이다. 물리적 악은 죄에 대한 벌이기 때문에 신의 확고부동한 정의(正義)를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죄의 원인이며 자유의지를 준 것은 신이라고 논박함으로써, 신을 악의 주모자로 간주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게 된다. 피조물이 누리는 모든 실재적인 것은 신으로부터 유래하며 그것은 신의 협력 없이는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은 악의 실제적 원인이 아니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라이프니츠는 유명한 비유를 인용함으로써 답한다. 이 비유는 라이프니츠 스스로 “자연 자체에서 끌어낸 예”로서 이보다 더 견고한 것은 없다고 간주한 것이다.


“유명한 케플러와 그 이후의 데카르트는 (그의 편지들에서) 물체들의 자연적 관성을 이야기했다. 이는 결핍이 실체와 실체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불완전성과 결점의 형상이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 피조물들의 근원적 제약의 완벽한 이미지로서, 더 나아가 그 보기로서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서로 싣고 있는 짐만 다른 여러 배들이 동일한 강물의 흐름을 따라 떠내려간다고 해보자. 어떤 배들은 나무를 싣고 있고 다른 배들은 돌을 싣고 있으며, 어떤 배들은 더 많이 싣고 있고 다른 배들은 더 적게 싣고 있다. 이 상황에서 바람이나 노 등 다른 비슷한 수단이 개입되지 않는다고 가정할 경우, 짐을 가장 많이 실은 배들이 다른 배들보다 더 느리게 나아갈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무게가 지체의 원인은 아니다. 배들은 올라가지 않고 떠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도가 보다 높은 물체들, 즉 미세구멍이 더 적고 자기 고유의 물질로 더 차 있는 물체들의 무게가 늘어나는 것이 역시 지체의 원인이다. 이러한 물체들에서는 다양한 운동을 통해 미세구멍들 사이를 통과하는 물질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질은 근원적으로 지체 혹은 속도의 결핍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 결과적으로, 배에 짐을 더 실었을 경우 같은 흐름의 힘에 의해 움직여지는 물질이 더 많은 만큼 배는 더 느리게 가야 한다. 물체들의 충격에 관해서도 경험과 이성이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동일한 물질로 이루어졌지만 크기가 두 배인 물체가 같은 속도를 내게 하려면 두 배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이는 물질이 정지 상태와 운동 상태에서 절대적으로 무차별적이라면, 또 위에서 언급한 자연적 관성 즉 물질이 운동을 받는 것에 저항하는 특성을 부여하는 자연적 관성이 없다면 필연적인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이제 강물의 흐름이 배들에 가하고 전달하는 힘을 피조물들에 있어 실재적인 것을 산출하고 보존하며 그들에게 완전성과 존재, 능력을 부여하는 신의 행동과 비교할 수 있겠다. 내가 말하건대, 물질의 관성은 피조물들의 자연적 불완전성과 비교하고, 짐을 실은 배의 느림은 피조물의 질(質)과 행동에서 나타나는 결함과 비교할 수 있겠다. 이보다 더 정확한 비유는 없을 것이다. 강물의 흐름은 배 운동의 원인이지 지체의 원인이 아니다. 신은 피조물의 본성과 행동에서 완전성의 원인이며, 피조물의 수용성 제약은 피조물의 행동 안에 있는 결함들의 원인이다. 이렇게 플라톤주의자들, 성 아우구스티누스,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이 실재적인 악의 질료적 요소의 원인이며, 결핍인 형상적 요소의 원인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는 강물의 흐름이 지체의 질료적 요소의 원인이지만 그 형상적 요소의 원인이 아닌 것처럼, 그것은 배의 속도의 원인이지만 그 속도 한계의 원인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신은 강물의 흐름이 배의 지체의 원인인 정도로 미약하게 죄의 원인이다.”(변신론, 제1부, 30절)

 

악의 원인은 신의 의지가 아니다

신은 악의 본질 또는 형상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물”, “배” 등 모든 것은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실재적이다. 이들 간의 관계에서 “악”이 조합되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신은 악의 질료적 요소의 원인이다. 달리 말하면 신은 죄에서의 실제적인 행동을 이루는 부분들의 원인이지만 그 행동을 한정하는 원인은 아니다. 죄는 그런 한정에 있으며 한정은 피조물 간의 우유적(偶有的) 관계, 즉 발생할 수도 또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결국 악의 원인은 신의 의지에 있지 않다. 도덕적 악과 물리적 악은 필연적이지 않지만, 그것들이 발생한다면 그 원인은 피조물의 불완전성에서 찾아야 하며, 피조물의 불완전성은 신이 최상의 지혜를 통해 최선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 “악의 원천은 피조물의 관념적 본성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 답이다. 피조물의 관념적 본성은 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신의 지성에 있는 영원한 진리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제1부, 20절) 신이 물리적 악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그것의 창조자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악의 제1원인, 즉 피조물의 근원적 제약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요컨대 신은 최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최선의 방식에 따라 모든 것을 주관한다는 낙관론이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세계는 악보다 선이 더 많다. 수많은 고통과 아픔으로 점철되어 보이는 우리의 일상을 고려할 때, 라이프니츠의 낙관적인 단언에 대해 쇼펜하우어가 퍼부은 조롱과 분노도 이해가 될 법하다. 그러나 앞서 비관론의 문제를 살펴보며 확인했듯이 쇼펜하우어 같은 불세출 비관론자의 논의에서도 고통은 항상 대조를 통해서 나타나며 현상의 불충분성도 존재의 탁월함과 비교하여 인정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고통을 일의적으로 보는 것은 단견에 불과하다. 경험적인 차원에서도 불행에 대해 과장할 필요가 없다. 불안과 고통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이는 쾌락의 조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통은 쾌락의 약속이며 완전성의 예고다. 쾌락은 일률적인 과정에서 오지 않는다. 계속되는 쾌락은 권태를 낳으며 우리를 어리석게 할 뿐 진정으로 즐겁게 만들지는 않는다. 일상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약간의 신산스러움, 약간의 쓰라림 혹은 씁쓸함은 달콤함보다 더 기쁨을 준다. 약한 어둠은 색깔을 부각한다. 그뿐 아니라 필요한 곳에 들어간 불협화음은 화음에 강조점을 준다. 우리는 줄에서 거의 떨어질 듯한 줄타기 무용수들을 보고 불안해하기를 원하며, 비극을 보고서 거의 울기를 원한다. 한 번도 아파보지 않고서 건강을 충분히 느끼고, 건강에 대해 신에게 감사할 수 있겠는가? 거의 언제나 약간의 악이 선을 두드러지게, 즉 더 크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변신론, 제1부, 12절)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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