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문제
지금까지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낙관론의 원리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인 신이며 신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과연 최선의 세계는 비관론이 그토록 강조했던 세계의 고통 및 악과 양립 가능한가? 낙관론은 세상의 고통에 대한 조롱이 아닐 수 있는가? 더 근본적으로는 신이 창조자라면 악도 결국 신의 작품이 아닌가? 예를 들어 인간이 자유롭게 저지르는 악은 신의 협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신의 행동은 선, 성스러움, 정의(正義)와 대립할 것이다. 모든 존재와 사건은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으므로 인간이 행하는 선과 악은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인간은 보상도 벌도 받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는 행동의 도덕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신과 인간의 정의(正義)에 어긋나는 것이다. 즉, 악한 의지는 신의 일정한 협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악한 의지를 인간에게 생겨나게 하는 신의 예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어떤 행동이 악하다고 해서 그것이 신에게 의존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선과 악의 두 원리를 설파하는 마니교가 설득력을 얻게 되거나 신이 선과 악을 무차별적으로 행하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학설들이 생긴다. 또는 원죄 개념을 인정하고 신의 은총을 통해 선한 이들이 구원된다는 관점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구원받을 것이고 나머지 모든 이들은 영원히 사멸할 것이기 때문에 난점은 그대로 남게 된다. 천벌을 받는 이들은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해도 신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이들에게 신앙을 부여하거나 신앙을 가질 환경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역시 신은 악에 책임이 있어 보이며 악과 관련된 난점은 해결이 불가능해 보인다.
라이프니츠는 세상의 악을 보는 대신에 선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식의 경험적 또는 교훈적 접근을 시도하기보다는 자신의 철학적 체계에 근거하여 선험적으로 악의 문제에 접근한다. 우선 그는 세 가지 형태의 악을 구분한다. 악에는 형이상학적 악, 도덕적 악, 물리적 악이 있다. “악은 형이상학적으로, 물리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악은 단순한 불완전성이며, 물리적 악은 고통이고 도덕적 악은 죄다. 그런데 물리적 악과 도덕적 악은 비록 필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영원한 진리를 근거로 가능하다고 보면 된다.”(변신론, 제1부, 21절) 달리 말하면 형이상학적 악은 모순 없이는 부정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에 속한다. 한계와 불완전성은 창조자와 피조물을 구분하는 유일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인 신이 자신만큼 완전한 존재를 창조한다면 이 두 존재는 서로를 제약하는 상대적인 존재들이 되고 신은 신이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신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이므로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신과 동일하게 완전하다면 두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게 되고 결국 절대성이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는 유일하고 나머지 모든 존재는 불완전하다. 신은 무한히 많은 모나드를 창조하며 모든 모나드는 식별 불가능성의 원리에 따라 서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불완전성의 무한한 등급 또는 모든 종류의 제약들이 있다. 즉 세계의 선과 신의 정의를 변호하기 위한 주된 논거는 세계의 악이 최선의 실현을 위해 산출된 부산물이라는 점이다.
결핍적 본성
따라서 신의 지성은 의지를 통해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미리 악의 등급을 결정한다. 즉 신은 무한히 많은 불완전한 실체들인 모나드들을 창조할 것이기 때문에 악의 등급은 무한하다. 그러나 악은 최선의 세계를 창조하는 차원에서 생기는 부산물이기 때문에 선의 결핍일 뿐이며 적극적인 본질을 갖는 것이 아니다. 신은 악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신보다 덜 선한 존재들을 창조한다. 따라서 악은 “결핍적 본성”(nature privative du mal)만을 갖는다. 신은 악의 본성을 직접적으로 창조하지 않는다. 악은 선이 결핍된 것이므로 신이 선을 창조할 때 나타나는 부차적 산물이다. 따라서 악의 “본성” 자체는 어떻게 보면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결핍적”(privative) 본성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큰 존중을 표시하지만, 악을 물질 또는 질료와 동일시하는 그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창조되지 않았고 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한 질료로 악의 원인을 돌렸다. 모든 존재를 신으로부터 도출하는 나로서는 악의 원천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변신론, 제1부, 20절) 최상의 존재인 신은 또 하나의 다른 신을 창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피조물은 근원적인 불완전성을 타고나며 피조물의 근원적 제약이 악의 형이상학적 근원이다. 달리 말하면 형이상학적 악 혹은 피조물의 불완전성은 창조 이전에 이미 관념적으로 신의 지성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기독교적 진리를 인정하고 지성을 통해 구상한 것을 창조하는 신의 개념을 인정하는 라이프니츠는 창조 개념이 부재하고 제1 질료를 신과 무관한 것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차이를 두는 것이다.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을 “이교도”로 보는 라이프니츠의 관점에서는 물질의 창조를 최상의 신이 아닌 하위의 신 혹은 “제작자로서의 신”인 데미우르고스에게 돌리는 플라톤의 관점도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불충분한 것이다.
결국 라이프니츠는 악의 문제를 견고하게 자신의 철학 체계를 통해서 설명한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인 신은 다른 신을 창조할 수는 없다. 두 개의 동일한 절대적 완전성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절대성을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에 신은 절대적 완전성을 갖추지 않은 세계들 가운데 최선의 세계를 창조한다. 이 최선의 세계는 무한히 많은 불완전한 개체적 실체들, 즉 모나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신은 최소의 수단으로 최대의 목적이나 결과를 산출하는 원리인 최적률에 따라 행동하므로, 이 무한히 많은 실체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정신적 입자들이며 서로 부대끼지 않기 위해 각각 다르게 조직되어 있다. 각 실체는 나머지 모든 실체를 자신의 관점에서 지각하며, 따라서 우주는 무한히 많은 실체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하나이지만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각각의 실체에 의해 투영된다. 하나의 우주가 무한히 많은 우주의 모습을 표현하는 최적률이 실현되는 것이다. 모든 실체는 정신적인 입자들이지만 모두가 신보다 불완전한 지각을 가지고 있고, 이런 지각의 혼란성이 물질세계를 구성해 낸다. 지각의 혼란성과 투명성의 정도가 각각의 실체의 완전성의 등급과 악의 등급을 특징짓는다. 결국 악은 최선의 세계를 위한 부산물일 뿐이다. 신의 창조 계획은 최상의 지혜를 통해 구상된 것이므로 피조물의 불완전성은 엄밀히 말해 최선의 구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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