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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 낙관론_악의 혼합과 논쟁

by 잡다정보 2025. 1. 29.

몇몇 작은 무질서는 큰 질서에 부합한다.

악의 혼합을 통한 자극

우리의 주의력은 악의 혼합을 통해 자극받을 필요가 있다. 도덕적 발전에 있어서 잠시간의 안 좋은 고뇌는 더 큰 완전성을 향한 지름길이다. 물론 우리는 죄도 없고 불행도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소설이나 유토피아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라이프니츠는 실제로 그런 문학작품들도 존재했었지만 그들이 묘사한 세계도 선에 있어서 우리의 세계보다 매우 뒤떨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런 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세계의 악을 과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악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세계는 무질서하게 보인다. 그러나 음악가가 멜로디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청취자를 고무시키기 위하여 불협화음을 허용하는 것처럼 신은 무질서를 허용한다. 몇몇 작은 무질서는 큰 질서에 부합한다. 최선의 전체에 속한 부분이 필연적으로 부분 자체로서 가능한 최선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몇몇 작은 무질서는 큰 질서에 속한다. 이 작은 무질서는 전체에서는 외형적인 것일 뿐이며, 질서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의 행복에 비하면 그것은 외형적인 것조차도 아니다.”(변신론, 제3부, 243절) 사물들에 대해 보다 넓은 시각을 갖는다면, 가까이서 볼 때는 구분도 되지 않고 예술적 감흥도 주지 않는 그림의 색깔들이 거리를 두고 보면 정돈되어 나타나는 것처럼 조화가 혼돈의 뒤를 잇는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질서한 외형들은 무지한 이들의 불완전성에 기인한 판단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재미있는 모래 점쟁이의 재주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그러듯이, 누군가가 종이 위에 무작위로 많은 점을 찍어놓았다고 가정하자. 그래도 나는, 그 개념이 어떤 특정 규칙을 따르는, 일정하고 균일하면서도 손으로 찍은 순서와 동일한 순서로 모든 점을 연결하는 기하학적인 곡선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한 번에 곧기도 하고, 때로는 원형을 이루기도 하고, 또 때로는 다른 형태를 지니기도 하는 곡선을 그린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곡선상의 모든 점에 공통적이고, 그것을 따라 바로 이 변화들이 발생해야 할 한 개념, 또는 규칙, 또는 한 방정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예를 들어, 그의 윤곽이 한 기하학적 곡선의 한 부분을 이루지 않고 특정 규칙에 따른 운동을 통하여 한 번에 그려질 수 없을 그러한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규칙이 매우 복잡하다면 그에 따른 것이 불규칙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는 신이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창조했든 간에, 항상 규칙적이고 어떤 특정의 일반적 질서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형이상학 논고 6절)


무지한 자에게는 연관도 없고 원리도 없어 보이는 수나 곡선에서 수학자는 수의 법칙, 곡선의 방정식과 규칙적 구성을 발견한다. 정확히 같은 관점에서 라이프니츠는 물리적 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어떤 질서도 나타나지 않은 채 수들이 변화무쌍하게 증가하거나 감소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전적으로 불규칙한 급수(級數)나 수들의 계열을 제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숫자들의 배열에 대한 실마리를 알고 이 급수의 기원과 구성을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규칙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며, 이 규칙이 제대로 이해될 경우 그 급수가 전적으로 규칙적이고 더 나아가서는 훌륭한 속성을 지닌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이 같은 점은 선(線)들에서 더 잘 나타난다. 한 선은 전진할 수도 있고 후퇴할 수도 있으며, 극대점과 극소점, 반환점과 변곡점, 중지와 그 밖에 다양한 성질을 가질 수 있으므로, 선의 한 부분만을 고찰할 경우에는 규칙도 이유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기하학자가 사람들이 불규칙적이라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의 이유와 일치를 발견할 수 있을 선의 방정식과 작도를 제시할 수 있다. 또한 기괴한 현상들과 우주의 결함들이라고 불리는 것의 이유와 조화에 대해서도 그런 방식으로 판단해야 한다.”(변신론의 제3부, 242절)

 

라이프니츠와 벨의 논쟁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신은 단지 무한히 많은 세계 가운에 최선의 세계를 실현하는 데에 관심을 쏟는 위대한 건축가가 아니겠는가? 그는 특히 도덕적인 차원의 국지적인 결함에는 큰 관심이 없고 최선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전념하기 위해 도덕적 악을 방치하는 것은 아닌가? 이는 라이프니츠에게 변신론 집필의 동기를 제공했던 피에르 베일의 중요한 반론이다. 물리학이나 존재론을 우위에 둘 경우, 도덕적 악, 그리고 그 귀결인 물리적 악의 문제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벨의 반론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단지 건축술과 기계적 구조에 대한 자신의 무한한 지식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선하며 덕의 벗이라는 그의 속성은 그런 위대한 작품의 작도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신은 지식에 대해서만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그는 몇몇 원자들이 일반적인 법칙들이 요청하는 것보다 더 빨리 움직이거나 더 느리게 움직이는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인류 전체가 소멸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변신론, 제3부, 247절)


사실 라이프니츠는 인간의 다양한 도덕적 악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를 신의 존재론적 구상을 논거로 해소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베일의 반론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답은 매우 중요하다. 라이프니츠는 다음과 같이 베일에게 대답한다.


“벨이 내가 구상한 일반적 조화의 체계를 알고 있었다면 그러한 반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체계에 따르면, 작용인의 왕국과 목적인의 왕국은 상응하며, 신은 가장 위대한 건축가의 자질에 못지않은 최선의 군주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또한 물질은 운동 법칙들이 정신들을 위한 최선의 운영에 사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결과적으로 형이상학적·물리적·도덕적 선을 모두 합쳐 헤아려본다면 신은 가능한 최대의 선을 창출했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247절)

출처: 이근세, 『철학의 물음들』, Bi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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