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행동 방식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라는 신의 개념으로부터 신의 행동 방식이 결정된다. 신은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가장 바람직한 방식으로, 가장 소망할 만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신의 완전한 행동은 형이상학적 차원과 도덕적 차원에 적용된다. 즉 신은 최상의 지혜, 최상의 능력, 최상의 선을 발휘한다.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신의 개념은 낙관론의 원리가 된다. “우리 인간의 관점으로 표현하자면, 신의 작품들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것들을 탁월하다고 볼 것이며 우리가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라고 볼 것이다.”(형이상학 논고, 1절)
라이프니츠의 신 개념에 따르면 신은 아무 규칙도 없이 무작위로 능력과 선을 발휘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존재는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전제군주와 다를 바 없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에게 절대적 능력만을 부여하는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신 개념은 신의 목적과 계획, 즉 지혜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신의 참모습을 표현하지 못한다. 오히려 신의 능력과 선은 지혜에 따라 계획적으로 발휘되기 때문에 신의 행동은 목적성을 갖는다. 신은 지성을 통해 필연적으로 참되고 선한 모든 것을 보며 의지를 통해 최선을 실현한다. 따라서 신이 만든 작품에는 “선과 완전성의 규칙”이 내재되어 있다.
신은 최선을 실현하기 때문에, “신은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신은 우리가 사는 현 세계보다 완전한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만일 신이 세계를 창조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실현하지 않았다면 그는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 적은 악이 선의 요소를 가지는 것처럼 더 적은 선은 악의 요소를 지닌다. 따라서 신이 더 적은 완전성을 실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라이프니츠의 논변을 더 상세히 살펴보자. 신이 더 잘할 수도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신이 세계를 만든 방식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데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근거를 되돌려 보낸다. 신의 행동 방식을 모른다면, 현재 세계보다 더 좋은 세계가 가능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경솔한 주장이다. 스스로 모른다고 했으면 침묵하는 것이 좋다.
결국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으로 압축된다. 그것은 최선의 규칙, 또는 최적률(optimum)이다. 불완전한 것들은 그 최종점이 없지만 완전한 것은 최종점을 향한다. 달리 말하면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단 하나의 “최적”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 변신론에서 라이프니츠는 꼭대기는 있으나 밑변은 없는 피라미드의 비유를 통해 말한다.
“홀들은 피라미드형으로 올라갔다.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홀들은 더 아름다워졌고, 더 아름다운 세계들을 표현했다. 결국, 피라미드가 끝나는 마지막 홀, 모든 홀 중 가장 아름다운 홀로 왔다. 피라미드는 시작이 있었으나,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피라미드는 꼭대기는 있으나 밑바닥은 없었다.”(416절)
만일 신이 최선을 선택하여 창조하지 않는다면, 무한히 많은 하위등급의 세계를 선택할 수 있게 되므로, 사실상 선택의 근거를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신이 만들 수 있는 세계가 1등급에서 10등급까지 있다고 해보자. 신이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신이 1등급을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등급이나 3등급, 나아가 10등급을 만든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신의 절대적인 자유를 보존하려고 신을 폭군이나 전제군주로 생각하는 셈이다. 게다가 2등급의 세계가 좋은 이유는 단지 3등급보다 높기 때문일 것이다. 더 못한 일보다 잘했기 때문에 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할까? 이 논리대로라면 사실 선택의 이유는 설명할 수가 없게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세계의 등급을 1등급에서 10등급까지로 설정했지만, 실질적으로 하위의 등급에는 끝이 없다고 할 때, 신의 선택에 대한 이유가 더 아래 등급보다는 높기 때문에 좋은 이유라고 말할 경우, 신의 이유에 대한 설명은 끝이 없게 된다. 결국 신은 불완전한 아무런 세계나 만든 셈이 될 것이고, 또다시 우리는 전제군주의 자의적 선택 방식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최선의 등급인 1등급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은 그것을 실현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신이 최선만을 행해야 한다면 신의 자유가 파괴될 것이라는 반박에 대해서도 라이프니츠는 이유가 행동을 이끌되 강제적이지는 않은 최선의 것일 경우, 그 이유에 동의하는 것은 자유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신이 아무 이유 없이 행동한다면, 세계는 절대적 우연이 지배하게 될 것이고, 라이프니츠는 오히려 이런 우연의 신이야말로 전제군주나 폭군과 같다고 주장한다.
최선의 규칙 또는 최적률
그렇다면 최선의 규칙 또는 최적률은 무엇인가? 라이프니츠가 선호하는 도형의 예를 들어보자. 어떤 정사각형은 변의 합이 16, 면적이 16이다. 이것이 최대치다. 반면 16의 변을 가지고서 더 적은 면적을 만드는 일은 끝이 없다. 가로 2, 세로 6의 변을 가진 사각형은 12의 면적을 만든다. 더 나쁜 사각형은 1과 7의 변을 가지고서 7의 면적을 만들어 내는 경우다. 그러나 무한히 역진하여 가장 나쁜 삼각형을 말할 수는 없다. 반면 가장 좋은 사각형은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최악은 없지만 최선은 있다. 그래서 모든 사각형 가운데 정사각형이 더 좋은 도형이다. 이런 논리를 확대 적용한다면 2차원 도형 가운데 가장 완전한 도형은 원이 되고 3차원 도형 가운데 가장 완전한 도형은 구가된다. 최소의 수단을 통해서 최대의 결과를 산출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최적률이다. “신의 방법들의 단순성은 수단들과 관련하여 명확히 드러나며, 그와 반대로 목적들이나 결과들은 다양하고 풍부하고 풍요롭게 나타난다. 그리고 수단과 목적은 건물에서 요구되는 규모와 아름다움을 갖추기에 필요한 예산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형이상학 논고, 5절) 비록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인 신의 모든 것을 우리가 알 수는 없겠지만 최적률을 통해 “일반적” 규칙은 엿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최적률의 여러 예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사물들의 지배에 있어 섭리의 방식과 관련된 몇몇 일반적 고찰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완전하게 행동하는 이는 탁월한 기하학자, 훌륭한 건축가,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 능숙한 기계공, 박식한 제작자와 유사하다. 탁월한 기하학자는 어떤 문제에 대해 최상의 구성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며, 훌륭한 건축가는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장소를 사용하며 건물을 위해 필요한 예산을 사용함으로써 눈에 거슬리는 것을 전혀 남겨두지 않으며 건물이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박탈할 어떠한 것도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훌륭한 아버지는 불모적인 것도 낭비도 전혀 없도록 그의 재산을 사용하며, 능숙한 기계공은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결과를 만들어내며, 박식한 제작자는 가능한 한 가장 적은 공간에 가장 많은 실재를 담기 때문이다.”(형이상학 논고, 5절)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박식한 제작자”는 누구일까? 여기서 “제작자”라고 번역한 프랑스어 auteur는 여러 의미가 있는 단어다. 맥락에 따라 “작가”를 뜻하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발명가”를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를 작가로 받아들여도 라이프니츠의 관점과 부합하는 것은 사실이다. 20여 쪽에 불과하면서도 라이프니츠의 주저로 간주하곤 하는 모나드론이 효율적인 저작의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가 이 단어를 신에게 적용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다음 문장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완전한 존재들, 그리고 가장 적은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서로 가장 덜 부대끼는 존재들은 덕을 완전성으로 갖는 정신들이다.”
달리 말하면 “박식한 제작자”인 신이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 정신이고 정신은 가장 적은 공간으로 가장 많은 실재를 담고 있다. 이 점은 신의 창조 방식뿐 아니라 창조 대상을 파악할 단서다. 신이 최적률에 따라 최소의 것을 통해서 최대의 것을 만들어낸다고 할 때, 그가 만드는 것은 무한히 많은 모나드다. 공간이 가장 적은 것은 가장 단순한 것, 즉 모나드다. 모나드는 단순하기 때문에 분할되지 않는다. 모나드는 분할되지 않기 때문에 물질이 아니다. 모나드는 정신이다. 모나드는 가장 적은 공간이므로 최적률에서 수단의 조건은 충족되었다. 그러나 목적 또는 결과의 조건은 충족되었는가? 모나드가 가장 많은 실재를 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를 해명할 때 창조의 의미가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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